도잔소 회의 있게 한 에큐메니칼 전사들

도잔소 회의 있게 한 에큐메니칼 전사들

[ 선교 ] 도잔소 25주년 기념 현장에서 만난 '도잔소 1세대들'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09년 10월 27일(화) 17:26
   
▲ 도잔소 1세대들. 사진 왼쪽부터 오재식박사(WCC JPIC 전 총무), 강문규목사(WCC 전 공동의장), 박상증목사(CCA 전 총무), 박경서박사(WCC 아시아데스크 전 총무).
이번 도잔소 회의 25주년을 맞이해 가장 감회가 깊은 이들은 뭐니뭐니 해도 1984년 도잔소 회의를 이끌어낸 '도잔소 1세대'였다.
 
이번 국제협의회에 참석한 오재식박사(WCC JPIC 전 총무), 강문규목사(WCC 전 공동의장), 박상증목사(CCA 전 총무), 박경서박사(WCC 아시아데스크 전 총무)가 바로 그들. 칠십이 넘은 '평화의 전사들'이지만 이들끼리는 아직도 '대머리', '이 자식'이라는 단어가 오고 갈 정도로 허물이 없는 '흰머리 소년들'이다.
 
이번 국제협의회에서는 한반도 통일운동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킨 도잔소 회의의 25주년을 세계교회가 함께 축하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가장 큰 감사와 찬사를 받을 이들로 '도잔소 1세대'를 꼽는데 이견이 없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이슈를 공론화하는 것이 암묵적인 금기였던 1980년대 독재정권 속에서 통일문제가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자 이들은 "정치가 못하는 것을 교회가 하자"며 의기투합,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인 도잔소 회의는 외형적으로는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가 주최한 것이지만 도잔소 회의는 WCC에 한반도 평화 운동의 시급성을 알리고, 국제회의를 조직하도록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실제적으로 그 회의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문규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우리가 원한 유일한 아젠다는 고립된 북한을 에큐메니칼 프레임에 끌어들이고 그것을 화해의 발걸음으로 삼자는 것이었다"며 "분단 65년 동안 도잔소 회의는 한반도 화해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가 되어 감사할뿐"이라고 말했다.
 
강 목사의 말대로 독재에 의한 금기라는 둑이 도잔소 회의로 터지자 글리온 1, 2차 회의가 연이어 열리면서 통일운동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오재식목사는 "81년도에 NCC에 통일위원회를 만들자고 요청한 후 모임을 가지려고 할 때마다 중앙정보부의 방해로 번번히 무산됐었다"며 "도잔소 회의가 열릴 때에도 정부측을 의식해 '통일'이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었다"고 회상했다. 오 목사의 증언대로 당시 도잔소 회의의 정확한 명칭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망'이었다.
 
박상증목사는 "당시 NCCK가 WCC에 한반도 통일에 대한 회의를 가질 것을 요청했지만 이러한 이슈가 채택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당시 WCC 국제위원으로 강문규목사가 일하고 있어 나이난 코쉬와 의견을 같이해 도잔소 회의가 결정됐다"고 말했다.
 
박경서박사는 "통일 문제를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의제로 올려 놓은 것이 도잔소 회의"라며 "에큐메니칼 필드의 후배들이 통일의 그날까지 순전한 노력을 기울여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번 국제협의회 축하예배에서 인명진목사(갈릴리교회)는 축사 서두에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기 통일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핍박을 각오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도잔소 회의를 기획하고 이끈 것은 통일과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특히 도잔소 회의를 있게 한 1세대 에큐메니칼 선배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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