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일화, 우화 등은 내 상상력의 촉매"

"성경 속 일화, 우화 등은 내 상상력의 촉매"

[ 인터뷰 ] 50년 문학인생 회고하는 자리 가진 박이도 전 경희대교수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09년 08월 03일(월) 09:47

"내가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가형(家兄)의 독서열 때문이었다. 그는 많은 문학서적을 탐독했는데 그

   
박이도교수는 문학인생 50주년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어린이 잡지에 투고하고 더러 독자란에 게재되었을 때의 성취감, 그리고 어머님의 격려가 내 문학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때마다 저 책 속에 무슨 이야기가 있기에 매일 밤을 새워가며 읽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고 결국 모방성의 글짓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 7월 22일 문학의 집ㆍ서울이 주최하는 수요문학 광장 '만나고 싶었습니다'에 소개된 시인 박이도교수(전 경희대ㆍ현대교회 은퇴장로)는 "각종 어린이잡지와 우화 동화책부터 성경 속의 일화들이 내 상상력의 촉매가 됐다"면서 "어린이잡지에 투고하고 더러 그 원고가 독자란에 게재되었을 때의 성취감, 그 때마다 어머님의 격려가 내 문학의 뿌리가 됐다"고 50년 문학인생을 회고했다.

"인간존재는 육신과 영혼으로 구별하고, 그 두 존재가 조화를 이뤄 생명의 존엄성을 얻게 된다고 믿는다"는 박 교수는 "이러한 자연의 존재, 인간으로서 내 문학적 인생의 흔적을 돌아보면 내 인생과 문학의 발자취는 한 길을 걸어가는 나와 나의 그림자가 됐다"는 말로 문학인생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말과 오스카 와일드의 '인생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말 둘다 유효하다"면서 "나의 문학은 대체로 어느 쪽에 가까웠을까?"라며 자문했다.

"한 때 유행가 가사를 치기(稚氣)가 있는 장르로 인색했지만 곡을 달아 부를 때 폭발적인 대중적 호응을 받는 것을 보았다"는 박 교수는 "시와 유행가 가사와의 문학적 차이점을 어떻게 분별해 정의내려야 할지 오래 생각한 적이 있었다"면서 "백합화가 향기를 내지 못한다면 꾀꼴새가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의의는 반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내 문학 작품이 독자의 공감, 일체감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면 부질없는 언어유희에 그쳤을 수도 있다"며 독자들에 평가의 기회를 남겼다.

더불어 "내가 '진정한 시인''이었나 하는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오늘의 심경"이라는 박 교수는 "누구는 사랑의 생명을 얻기 위해 누구는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기 위해 또 누구는 혁명을 위해 목숨을 던지듯 이념의 시를 쓰지 않으면 시도, 문학가도 아니라고 했다"면서 "내게는 모두 버거운 담론들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어떤 범주에 스스로를 귀속시킬만큼 특정한 사상이나 고정관념의 포로가 될 수는 없었다"면서 "문학활동은 자유정신의 도전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에 시적 대상, 장르적 형식성 언어의 시적 구속성 따위에서 자유로워 질 것을 항상 의식하고 경계해 왔다"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나는 모험 지향적 의지가 미약한 문학의 소시민으로 살아왔음을 안다. 이제 종착역에 와서 보니 아무도 없는, 이름도 없는 한 간이역에 내려선 것 같다"면서 "자괴감이, 노을 속에 묻히는 자화상을 처연히 바라보게 된다"고 심경을 밝혔다.

1938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한 박이도시인 59년 자유신문 신춘문예에서 시부분 '음성'이 당선됐으며 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황제와 나'로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으며 '회상의 숲' '북향' '바람의 손끝이 되어' '불꽃놀이' '빛과 그늘'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박 교수는 본보 기독신춘문예 제1회부터 7년 동안 시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재 창조문예 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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