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조직 이전 선교사 파송 역사도 중요"

"총회 조직 이전 선교사 파송 역사도 중요"

[ 선교 ] 기독공보 6월 13일자 신문을 보고…

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01일(수) 14:59

"본 교단은 1912년 총회를 조직하면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기독공보 6월 13장자 7면 '방지일목사 기념사업회' 기사 중) 물론 이 말을 그대로 본다고 하면 틀린 것은 없다.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있어서 몇 자 의견을 적어 본다.
 
1912년은 우리 총회가 조직된 해이다. 그러므로 총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한 것만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파송해 왔다. 목사 선교사를 말한다면 1907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로 보냈다. 어떤 이는 이를 비하하여 국내 전도일 뿐이지, 외국에서 하는 선교는 아니라는 말도 한다. 이 또한 편협한 시각이긴 하지만, 우리 한국 교회는 총회가 조직되기 3년 전 1909년에 외국으로 목사 두 명을 한꺼번에 선교사로 보낸다. 그 중 한 사람이 한석진목사였고, 일본 동경으로 보내졌고, 다른 한 사람은 최관흘 목사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낸다.
 
최관흘목사는 1909년 11월 5일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당국 곧 내무성에 선교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이 편지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내무성(모스크바)에서 제한적이긴 하지만 선교를 허락했다. 최관흘목사는 1910년 9월 제4회 조선국 노회에 출석하여 선교보고를 하고, 이 보고에 온 회중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1년 선교비 3분의 2 정도의 헌금을 즉석에서 모금하여 다음해도 선교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최관흘 선교사의 왕성한 활동과 놀라운 선교 결과는 마침내 러시아 정교회의 시기를 받았고, 1912년 모든 외국 선교사를 러시아 국내에서 추방할 때 최관흘 선교사를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추방 명령까지 내리고도 최관흘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고 있다가, 1912년 12월 30일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가게 된다. 이 일로 인해 한국 교회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을 찍었으나, 정교회로 넘어간 최관흘은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정교회로 갔다고 했으나, 한국교회는 이를 전혀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 왔다.
 
정교회에 넘어간 최관흘은 교리문답사가 되어서 한인들에게 성경과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고 세례문답을 하거나 십자가, 중생, 속죄함 등을 주제로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정교회가 1917년 공산 혁명으로 무너지자, 정교회에서 나와서 개인적으로 열심히 전도하다가 1922년 8월 31일 함북노회에서 다시 목사로 임직하게 되는데, 다시 임직하는 이유를 전도한 결과가 혁혁하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목사 선교사외에도 평신도 선교사가 훨씬 많이 있다. 물론 이들의 이름이나 행적을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들의 헌신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동력이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다. 쉽게 말한다면, 권서인과 매서인들이 이들이며, 전도부인도 선교사로 부르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 외에도 우리 한국교회는 또 다른 전통이 있다. 가난하여 십일조를 바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일년의 십일조로 환산하여 36일 동안 집을 떠나 타지에서 선교하면서 이를 '날연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권서인과 매서인에 대해서는 성서공회(대한성서공회사II)에서 잘 정리한 것이 있지만, 이들 날연보한 이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혹은 어디에서 어떻게 선교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정 호 상
러시아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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