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구제', 믿는 이의 마땅한 직무

⑩ '구제', 믿는 이의 마땅한 직무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3월 19일(목) 10:15

   
▲ 칼빈은 종합구빈원, 프랑스기금 운용을 통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사진은 스위스 제네바대학 담장의 칼빈 부조.
이 땅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이래 한국교회는 괄목할 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 기독교의 성장이 정체 혹은 둔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데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교회의 성장 위주 전략이 사회봉사라는 본질적인 사명을 소홀하게 만든 점도 그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본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조사가 얼마 전 발표되었다.

'2008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기독교가 사회의 신뢰를 받기 위해 가장 열심히 해야 할 활동을 묻는 질문에서 '봉사와 구제'라는 응답이 47.6%로 1위를 차지하였다. 그 뒤를 이어 '윤리와 도덕성 회복'이라는 응답이 29.1%로 2위를 차지하였고, '환경 및 인권운동' '교육활동' '문화 및 예술 활동' 순으로 나타났다.

근래 들어 교회 안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고조되고 있으며,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교회의 핵심적인 사명으로 여기고 목회의 중심에 두려는 교회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한국교회가 사회를 섬기려는 노력과 관심을 회복하고 있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본래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고 살리는 공동체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이 성장에서 섬김으로 전환되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에게서 섬김의 목회, 즉 디아코니아 목회의 선례를 볼 수 있다.

16세기 개혁교회의 요람 제네바에서 칼빈은 교회를 통해 오늘날의 사회복지 제도를 무색케 할 정도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제활동을 펼쳤다.

특히 제네바의 종합구빈원을 통한 구제활동이 대표적인데, 종합구빈원은 종교개혁 이전 제네바에 있던 여러 구빈원들을 통합해 설립한 기구였다. 제네바 종교개혁이 종교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제네바에 진정한 혁명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합구빈원의 활동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제네바 종합구빈원은 프랑스 혁명기에 잠시 방해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되다가 1869년 종합요양원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기능은 동일하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종합구빈원은 1535년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가난한 자들을 위한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제네바의 종합구빈원은 구빈원장과 행정관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구빈원장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맡았다. 예전에는 사제들이 그 직무를 맡았지만 이제는 경영 정신을 지닌 사업가 출신의 평신도가 이 직책을 맡은 것이다.

구빈원장이 실제로 봉사하는 사람이었다면, 행정관은 구빈원의 재정을 책임지고 관리 감독하는 행정 책임자였다. 종합구빈원을 맡은 구빈원장과 행정관들은 매 주일 예배가 시작되기 전 아침 6시에 정기적으로 모였다. 이때 구빈원장은 행정관들에게 한 주간 동안 이루어진 일들을 보고하고, 빵의 분배와 돈의 지출에 대한 사항들을 함께 결정하였다.

대부분의 행정관들은 정부의 상설 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이었으며, 제네바의 치리를 담당하고 있던 컨시스토리(Consistory)의 장로들인 경우도 많았다.

제네바의 컨시스토리와 종합구빈원은 모두 상설 기관으로서, 전자는 제네바의 도덕성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고 후자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종합구빈원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책임을 맡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오늘날 한국교회 교육전도사 제도의 가장 이른 원형이 아닐까 싶다.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서처럼 구제사역이 철저하게 평신도에게 맡겨진 곳도 없고, 제네바에서처럼 이전의 모든 구빈원들을 완전히 철폐하고 구제기관을 집중화한 사례도 흔치 않으며, 제네바의 종합구빈원처럼 오랫동안 존속된 구제기관도 드물다.

사회봉사에 대한 칼빈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실례는 '프랑스 기금'이다. 1540년대 중반에 이르러 종합구빈원은 더 이상 제네바의 모든 구제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특히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제네바로 피신해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고 이들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민들을 위한 기관이던 종합구빈원과는 별도로 이방인들을 돕기 위한 새로운 기금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프랑스 기금이었다.

프랑스 기금은 종합구빈원과 달리 사적인 조직으로, 기부자들이 선출한 평신도 집사들이 운영을 맡아 19세기 중반까지 3백년 이상 존속하였다. 칼빈은 집사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구제를 위해 세워진 직분이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집사를 교회 예전을 돕는 조력자나 사제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집사의 존재이유인 봉사와 구제의 직무를 강조하였다. 기금을 운영하는 집사들의 중요한 세 가지 임무는 돈을 모금하고, 분배하고, 가난한 자들을 심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프랑스 기금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동참과 노력으로 세워진 것이며, 프로테스탄트 박애정신을 보여주는 최초의 노력들 중 하나였다.

프랑스 기금을 위해 봉사했던 집사들의 명단과 기부자들의 명단은 잘 기록되어 있는 반면, 수혜자들의 이름은 회계장부에 사실상 익명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컨시스토리 문서, 소송사건의 기록, 집사들이 남긴 메모들에 여기저기 수혜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수혜자들은 대체로 여성, 아이들, 실직한 남성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기금의 도움을 받았던 피난민들이 나중에는 그 기금의 후원자들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칼뱅은 프랑스 기금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1554년 7월 1일에는 프랑스 기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칼뱅의 집에서 가지기도 하였다.

프랑스 기금은 또한 복음적인 사업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이 기금으로 칼빈의 성서 강의나 설교를 받아 적는 사람을 고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출판된 칼빈의 작품들은 또 다시 이 기금의 수익원이 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사용된 시편찬양집의 출판은 16세기의 가장 큰 출판사업 중 하나였다. 이 시편찬양집 역시 기금으로 출판되었고 그 판매수익 중 일부가 다시 기금으로 들어왔다. 프랑스 기금은 프랑스의 복음화에도 연관되었다. 집사들은 목사회를 대신하여 이 기금으로 프랑스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고, 선교사의 가족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기금은 유렵 개혁교회들의 광범위한 연결망의 중심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께 꾸어드리는 것."(잠언 19:17) 칼빈에게 있어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모두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웃사랑의 계명의 관점에서도 이 일은 우리의 마땅한 직무이다. 칼빈이 자선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유재산을 없애거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다. 칼빈이 강조한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16세기 칼빈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는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박 경 수 교수
▲ 현 장신대 역사신학 교수
▲ 미국 Claremont 대학교(Ph.D)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