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 세계선교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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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⑧'칼빈의 선교'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3월 04일(수) 11:38

   
▲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개혁에 집중하느라 외부적인 선교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지만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으며 나아가서는 브라질로 선교팀을 보낼 정도로 선교에 대한 깊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은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던 칼빈에게 제네바 교회개혁에 참여할 것을 강권하는 파렐(H. de Muyden의 칼빈 탄생 4백주년 기념작).
'종교개혁과 선교'는 현대 선교학에 있어서 미해결된 수수께끼의 문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개혁에 집중하느라 외부를 향한 선교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심지어, 개혁자들에게는 선교사상이 없고, 선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애석해한 흔적조차 없다고 한탄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삶을 통해서 이와 정반대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 개혁자는 물론 전도자와 선교사로서 프랑스, 스위스, 온 유럽, 그리고 브라질에까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칼빈은 부르쥬(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루터의 복음주의를 접하게 되고 회심하게 된다(1528-1529). 그는 한 서신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보았습니다. 마치 빛이 내 위에 쏟아져 비취는 것 같이,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과오의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었는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부정하고 더러워졌는가를 밝히 보았습니다. 내가 빠져 떨어진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한 나의 두렵고 떨리는 심정, 영원한 죽음의 절망에 대한 더 무서운 위협, 이런 것 때문에 나는 한 시도 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로 나는 주님이 지시하시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많은 통곡과 눈물로 과거를 저주하면서 나는 떠났습니다." 칼빈은 단순히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라, 분명 영적으로 거듭남을 체험했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것이다. 당시 가톨릭의 구원관은 인간이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여 신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신자들은 영세로부터 시작하여 종유예식에서 끝나는 일생을 성례라는 교회의식에 매여 있어야만 했다. 때문에 신앙심이 깊었던 칼빈 조차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런 그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교리를 통해서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그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모른 채 신음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영혼구원의 열정에 불타올랐다. 칼빈은 신학자 이전에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그는 복음으로 회심한 후, 즉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났고, 인문주의와도 결별하여 성경연구와 복음전파에 뛰어든다. 가톨릭 신부인 '갸녹지'는 칼빈이 부르쥬에서 이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가 전도했던 어거스틴 수도원의 '칼빈의 강단', 마을 한복판의 '칼빈의 돌', 이웃 마을 리니에르(Lignieres)의 '칼빈의 다리' 등이 그의 전도행적을 증언하고 있다.
 
1534년 10월, 벽보사건으로 핍박이 일어나자 칼빈은 박해를 피해 프랑스 지방 도시를 유리하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프랑스 중서부 지방 뿌아띠에에는 칼빈이 복음을 전하던 '칼빈 동굴'이 있다. 쌩똥쥬에는 그가 들판에서 복음을 외치던 칼빈의 강단이 있다. 앙굴렘에는 그가 추적하는 군사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동굴 속에 숨어 잠을 청했던 '칼빈의 돌침대'도 남아있다.
1536년, 그는 역사적인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게 된다. 강요는 칼빈 자신이 믿는 바 복음신앙의 고백서였다. 그는 강요를 라틴어로 출판함으로 전 유럽에 있는 지식인들을 겨냥하였다. 이 고백서를 통해 과거의 자신처럼 일평생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에 매여 불안에 떨고 있는 온 유럽의 엘리트 신자들에게 복음교리의 기초원리를 가르쳐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강요는 조직신학서가 아니라 청년 칼빈이 전 유럽을 복음화 하기 위한 열정으로 저술한 뜨거운 복음 전도서였던 것이다.
 
제네바를 지나가던 칼빈에게 파렐이 제네바 복음화를 위해 일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거절하는 칼빈에게 파렐은 "만일 이대로 가서 조용히 연구에만 몰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연구를 저주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 순간 칼빈은 정말로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아 요나와 같은 심정으로 제네바에 남게 된다. 그러나 무리한 개혁정책으로 본토인들의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추방된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생애에서 가장 안정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제네바로 다시 돌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에게 제네바는 고난의 땅이었다. 그 길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칼빈은 "만일 내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제네바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는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인 것을 알기에 내 심장을 바쳐 주님께 제물로 드립니다"라고 고백하고는 전쟁터와 같은 제네바로 돌아갔다. 이후로 하트모양의 심장 한가운데 손을 그린 그림은 그 유명한 칼빈의 문장이 됐다. 이 문장 옆에는 항상 '솔직히 그리고 충심으로'라는 문구가 있는데, 모진 고난의 길일지라도 솔직한 마음으로 충심으로 순종하겠다는 칼빈의 결단을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인인 칼빈에게 제네바는 타락한 '이방인의 성'과 같았다.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채택하고, 복음주의 도시로 선언을 한 것은 사부와 공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정치적인 동기도 있었기에 여전히 도덕적으로는 타락해 있었다. 제네바에서 늘 이방인이었던 칼빈은 많은 고난을 경험했다. 토박이들의 심한 반대에 여러 차례 직면했고, 작고하기 5년 전인 1559년에야 비로소 제네바의 정식시민이 되었다. 칼빈의 제네바 선교는 요나의 앗수르 선교와 비교할 수 있다. 선교란 반드시 멀리 이방 땅으로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가까운 이웃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선교이다. 칼빈은 제네바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요나 같은 선교사였던 것이다.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55년 비로소 모든 대적들을 잠재우고 안정을 찾게 되고, 이후 작고하기까지 10년간 외부선교에 집중하게 된다. 칼빈은 프랑스의 각 지역에서 쇄도하는 목회자 요청에 응답하여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칼빈은 1555년에서 1562년까지 공식적으로 88명의 선교사를 프랑스로 파송했는데, 박해시대였기에 익명으로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를 더한다면 적어도 두 배는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에는 1555년에 처음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1562년까지 2천1백50여 개 교회가 제네바 교회의 모범을 따라 개척되었다. 개신교인 수는 7년 만에 3백만(2천만 인구 중)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지리적으로 가톨릭 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칼빈의 제네바교회와 아카데미는 고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멀리는 스코틀랜드까지 유럽 전역에 전도자들, 선교사들을 보냈다. 
 
칼빈은 1556년 9월에 2명의 목사를 포함하여 14명의 개신교 최초의 선교단을 브라질로 파송했다. 칼빈의 브라질 선교의 목적은 브라질에 제네바의 모범을 따라 위그노 교회를 설립하는 일과, 인디언 원주민들을 선교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빌가뇽이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 선교사들을 박해함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지만, 이는 칼빈의 세계선교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칼빈은 회심한 이후 복음전파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칼빈에게 선교란 우주적인 복음전파를 의미한다. 그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전세계를 향한 선교열과 괄목할만한 선교성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그들의 선교는 복음전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로마교회의 확장과, 로마 가톨릭 제국의 영토 확장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로마교회의 선교를 '배나 지옥자식을 만드는 일'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칼빈의 복음전파로서의 선교의 원리는 오늘의 선교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시대는 변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가 아니라 복음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복음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개인을 구원하고 교회를 개혁하며, 사회변혁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어야겠다.

김 성 현 목사
 ▲ 총회파송 프랑스선교사 역임
 ▲ 프랑스 엑쌍프로방스개혁신학대학(F.L.T.R.)  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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