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도 '처음'처럼

'마무리'도 '처음'처럼

[ 기고 ] 목양칼럼 / 박금호목사(4)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11월 06일(화) 00:00

박금호목사 /광천교회 시무

그해도 풍년이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던 토요일 초저녁, 할머니 성도 한 분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전도사님! 전도사님! 비가 올라고 헌디, 우리 나락벼슬(볏단 쌓기) 좀 눌러주시오∼잉!" 한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찌뿌린 날씨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내달리는 할머니를 뒤쫓아 갔다.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볏단을 쌓다보니 저녁은 깊어져 가고 빗방울이 쏟아질 때에야 비로소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워메, 감사 헌거∼, 미안혀서 어쩔꺼라우∼!"하며 인사를 연발하는 노 성도를 위로하고 발걸음을 사택으로 옮겼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마냥 귀중한 가을걷이를 비로 인해 망칠 상황에 애달아 있는 성도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렸다는 뿌듯함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 이발도 하고, 머리 고대도 하고, 포마드(*아주 오래된 화장품으로 젤리모양으로 두발에 광택을 주고, 원하는 형으로 머리 모양을 정리하는 데 쓰는 정발료)로 광내 둔 머리를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했던 목회 초년병 시절이 생각난다. 

그 시절 종종 있었던 일들이 벌써 삼십 수년이나 지난 요즘,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왠일일까? "남은 십년을 처음 십년처럼!" 요즘 나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기도제목이다. '끝이 시작 같으면 후회함이 없다'는 성현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제 십 수 년 남은 나의 목회여정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그래도 그때 같이만 마무리할 수 있다면 크게 욕은 먹지 않을 것 같은데'

1977년 첫 주일 준비했던 설교원고를 사택에 두고,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한 사도의 고별설교를 주일 대예배 시간에 읽었다. 그리고 처음 목회를 정리하겠다는 고별설교를 해 버렸다. '이 교회는 이만큼 성장했으니 목사님을 모셔도 충분합니다. 저는 아직 젊으니 부교역자로 청하는 곳이 있으면 가서 배우겠습니다"고 뜻밖의 설교를 해버렸다. 

6년을 시무하며 예배당을 옮겨 신축하고, 오천 원 받던 전도사가, 십일만 오천 원을 처음 받던 그해(1977) 첫 주일에 너무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철부지 행동을 했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남은 십여 년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과 후일 우리 교회 역사에서 부끄럽게 기억되지 않을까? 그리고 '제 아버님을 목사님으로 제일 존경합니다'고 신대원 면접관에게 당당히 대답했다는 아들 녀석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여러분의 삶을 믿음과 봉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 부으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빌2:17)라고 고백한 옥중의 노사도의 고백을 생각해 보면서, '처음 시절'같지 못한 내 목회 사역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량사고가 나서 죽게 되었을 때, '내가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성전을 이전 신축하기 전에는 못 떠난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하며 노래 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을까?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의의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이렇게 끝내지 못하고, 왜 나는 둘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는 것일까?  나이 육십에 벌써 노욕(老慾)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경륜이 쌓여 지혜로워진 것일까? 아니면 교활해진 것일까? 내 목회, 내 인생 마무리를 시작 때처럼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려서 읽었던 '곱게 늙어야지'하시던 길 떠나신 어른 목사님의 책 제목이 떠오르기는 한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아직 십 년하고도 이년 이상이나 남겨두고서 하는 어설프고 건방진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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