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문학기행/ 심훈의 문학산실 '필경사'

크리스찬 문학기행/ 심훈의 문학산실 '필경사'

[ 교계 ] 푸른작가 심훈선생, "붓으로 밭을 일구는 집"에서 52일만에 '상록수' 탈고

정보미 기자 jbm@kidokongbo.com
2007년 06월 05일(화) 00:00
【충남 당진=정보미】 초록색 계절에 푸르디 푸른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들을 만나러 아침부터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심훈 선생이 살아생전에 '상록수'를 집필했던 문학산실 필경사. 당진에 도착해 다시 한진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도시 풍경을 뒤로 하고 고개 내민 볏 잎과 함께 녹음이 짙어지는 농촌 풍경을 맞이하며 다다른 그의 집에는 오래된 원고지 내음만이 남아 있었다.

   
심훈 선생의 문학산실. 심 선생은 이곳에서 52일만에 '상록수'를 탈고 했다.
충남 당진 송악면 부곡리에 위치한 필경사(筆耕舍). '붓으로 밭을 일구는 집'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심 선생이 1934년 신문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직녀성'의 원고료로 직접 설계한 집필실이다. 초가지붕 아래 목조로 기둥을 세우고 황토를 짓이겨 벽체를 만든 필경사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었다.

내부에는 그가 집필하던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읽었던 책가지가 흩어져 있고 등불과 옷가지들, 그리고 부엌의 아궁이에 누다락, 화장실까지. 빛바랜 원고 뭉치와 이불의 곰팡이, 창문에 쳐있는 거미줄만이 시간이 오래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필경사 내부에는 그가 집필하던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심훈 선생이 사용하던 책상.
책상 앞에 서서 상록수를 집필하던 그의 모습을 재현해 본다. 생각에 잠기고 이야기를 구상하다 막힐 때면 그는 창문을 열었으리라. 직사각형의 초가집에는 동서남북 어디하나 막혀있는 곳이 없었다. 창이 나 있거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 그리고 집 밖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싸여 있다. 집 뒤뜰에는 심 선생이 직접 심었다던 대나무 밭이 그리고 양 옆에는 상나무들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이 같은 초록빛 세상 속에서 상록수를 지었던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한곡리(한진리와 부곡리를 합친 말)에서 동지로서 농촌계몽의 뜻을 모으고 연인으로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일제의 수탈에 극도로 피폐해진 시절, 그들은 눈 뜬 장님이던 농촌 백성들을 위해 학업을 가르칠 농우회관을 짓고 교회를 빌려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한다. 상록수는 복종과 굴욕만 강요당하던 그 시대에 민중의 갈 길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심훈 선생.
1935년, 심훈 선생은 이곳 필경사에서 상록수를 52일 만에 탈고한다. 그리고 이듬해 지병으로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필경사에는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심훈의 '그 날이 오면' 중에서)'라며 광복을 애타게 부르짖었던 그의 숨결만이 추억이 되어 남아있다.

상록수의 남자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은 심 선생의 장조카 심재영 씨다. 그는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이곳 부곡리로 낙향했다. 마을 내에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켰는데 이곳에는 당시 공동경작회 멤버 중 한 명인 김덕영 씨(93)가 생존해 있었다.

또 필경사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고 심재영 씨 생가에는 부인 김옥순 씨(90ㆍ부곡교회 집사)가 홀로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 영감님은 부초여. 너무 착했지. 그때는 남자가 하는 일에 여자가 관여하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겄지만 마을 주민들을 위해 진실로 애썼던 분이지." 김 씨가 회한에 잠기며 그에 관한 옛 기억을 전했다.

   
필경사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고 심재영 씨 생가에는 부인 김옥순 씨(90ㆍ부곡교회 집사)가 홀로 거주하고 있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다. 심훈 선생의 둘째 형 심명섭목사는 6·25때 강제 납북됐는데 그의 부인 권유희 씨가 필경사에 내려와 거주하며 1951년 9월부터 1970년까지 피난민을 중심으로 예배를 가졌다. 이 예배모임이 지금도 이곳에 남아있는 부곡교회의 시초이다.

필경사를 떠나며 소설 속에 또 다른 무대로 등장하는 한진포구에 들렀다. 필경사에서 1km 남짓 떨어져 있는 한진포구의 옛 이름은 '한나루'다. 영신이 연인 동혁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던 선창가. 서해대교 인근에서 아직 옛 정취가 남아 있는 이곳엔 얼마 전 '바지락축제'가 성황리에 끝났다.

조개껍질과 모래로 뒤덮인 바닷가에서 "꺼억- 꺼억-" 물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새소리와 함께 일과 사랑 두 가지 모두를 버릴 수 없다며 하나님께 눈물로 고백하던 영신의 모습이 잔상처럼 눈에 맺혔다.


*채영신의 실제모델 '최용신 선생'

   
안산 상록수공원에 안치돼 있는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 선생 묘소. 최 선생은 농촌여성의 문맹퇴치를 위해 안산 샘골교회를 중심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심훈 선생은 상록수 집필 동기에 대해 "신문에서 농촌계몽운동 중에 사망한 최용신이라는 여학생 기사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작품을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은 최용신 선생이다.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재학중이던 최 선생은 1931년 10월 경기 반월면 천곡(샘골, 현 사동)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떠난다.

농촌여성의 문맹퇴치를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최 선생은 샘골교회를 중심으로 1934년 봄까지 2년 반에 걸쳐 농촌운동에 헌신하다가 새로운 농촌 운동 전개의 필요성을 느껴 일본 고베여자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3개월 만에 각기병을 얻게 되고 죽더라도 천곡에 가서 죽겠다는 일념하에 천곡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안산 상록수 공원에는 그녀의 뜻을 기리는 각종 시비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그녀의 묘소 옆에는 고 김학준교수가 묻혀 있는데 그는 최 선생의 약혼남으로 사망하기 전 "내가 죽거든 최용신 옆에 묻어다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편 상록수 공원에는 오는 9월 개관 예정인 '최용신 기념관'이 건립되고 있다. 기념관 우측에는 생전 그녀가 사용했던 학교 종탑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곳이 그녀가 활발히 운동을 전개했던 요충지임을 알게 해준다.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고 외치며 죽기까지 농촌 계몽운동에 혼을 불태웠던 그녀.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또 민족운동의 영웅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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