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백년, 선교역사 꽃 피우다

순천 백년, 선교역사 꽃 피우다

[ 교계 ] 순교의 피 밑거름으로 복음의 씨앗 "큰 결실"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5년 12월 06일(화) 00:00
'하늘의 뜻에 순종한다'는 뜻을 지닌 순천(順天)은 인구 30만여 명 중 약 3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며 다른 지역에 비해 복음화율이 현저히 높고, 큰 교회들이 많다. 특히 본교단 교회가 전체 교회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1백년 전 이 지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한 세기를 지나면서 결실이 좋은 포도나무처럼 성장한 결과이다. 순천지역 선교 1백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편집자 주>

   
1910년대 순천 시내 풍경
순천의 선교 기점을 1894년으로 보느냐,1895년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1895년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1894년 4월 30일 레이놀즈,드류선교사가 녹동을 거처 벌교를 지나 순천에 도착하여 이틀 간 머물면서 장터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여수를 거쳐 남해를 지나 부산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당시 미 남장로회 선교사 보고서에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순천은 큰 성벽과 성문, 관청 등이 훌륭하게 축성돼 있었고 이웃에 큰 마을들이 있으므로 순천에 선교부를 세워 전라도의 남동쪽을 맡아 선교 하기를 기대한다"고 기록돼 있다는 것. 그후 1904년 목포에 기거하던 배유지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광주 양림리에 광주 선교부를 세우고 이듬 해인 1905년도부터 전남 동부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하여 선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순천지역 선교의 첫 발자국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기풍,나덕환,김형모,박정식 목사 등 4명의 목사를 총회장으로 배출하고 왕성한 교세를 자랑하는 순천지역의 1백년 선교 역사가 오늘날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일제 신사참배 반대로 이기풍,양용근목사의 순교와 박용희 손양원 김정복 김상두 김형제 오석주 나덕환 선재련 김순배 김형모 조상학목사,황두연 박창규 선춘근 김원식 장로 등이 대거 체포 구금돼 장기간 옥중 투쟁을 한 일,해방 직후 여순사건으로 인한 영흥교회 김병준장로와 윤형근 윤순근성도,손양원목사의 아들 동인 동신 군의 순교,6ㆍ25 한국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의 피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천선교부의 선교사와 가족들
1905년 오웬 선교사가 전남 동부지역을 전담하면서 비로소 순천지방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현 벌교 무만동교회,율촌 장천 교회가 세워지고 낙안 평촌교회(현 낙안 중앙),순천 가곡교회,이미교회,순천 중앙교회 등등이 속속 세워지기 시작했다. 순천지방이 활발한 선교가 진행되고 있던 1909년 오웬 선교사가 장흥,보성지방 전도 순회 중 급성 페렴으로 중단하고 가마에 실려 광주로 후송했지만 회생치 못하고 별세했다.

오웬선교사 별세후 변요한,배유지 선교사가 순회여행 중 순천에 들려 5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장천,이미,무만 등지에서도 세례를 베풀어 점차 세례교인이 늘자 광주에서 순천지역을 관리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1911년 변요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많은 선교사와 선교비 모금 업무를 수행하다 순천 선교부 설립비용으로 미화 1만3천 달러를 가져왔으며 13명의 선교사의 사례비를 매년 후원받기로 하여 순천지방에 선교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지난 11월 26일 순천선교 100년을 기념하여 6천여명이 교파를 초월해 모였다.
변요한 선교사는 매산 등 그 지역 일대를 매입하여 병원,학교,선교사 사택 등을 건립했다. 이로써 순천은 의료선교와 학원선교라는 양 날개를 통해 놀라운 부흥을 가져오게 됐다.

의료선교의 중추였던 안력산 병원은 1913년 건축감독관 사무실로 사용하던 4평 크기의 조그만 판자집에서 팀몬 수의사와 간호사 그레이양이 환자를 돌보면서 시작돼 1915년 35개의 침대를 갖춘 한국 최초의 가장 좋은 시설의 의원이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제의 태평양 전쟁 발발로 로제세 의사가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1940년 11월 폐지되고 말았다. 현재는 여수애양재활병원과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이 의료선교를 담당하고 있다.

순천에 선교본부를 둔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현지 지도자에 의한 복음전파를 계획하고 순천성경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했으며 순천지방에 세워진 매산학교는 이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고 현재까지 크게 성장하여 매산 고등학교,매산여자고등학교와 중학교로 성장했다. 1922년 9월 10일 경성승동교회에서 순천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1922년 10월 3일 순천성경학교에서 선교사 변요한 고라복,목사 곽우영 정태인 조의환 강병담,장로 김억평 오영식 서병준 장기용 이기홍 김일현 장현중 목치숙 박창규 등 제씨가 참여하여 노회를 창립했다. 초대 회장에 곽우영목사,부회장 변요한목사,서기 강병두목사,부서기 정태인목사,회계 이기홍장로,부회계 조의환목사가 각각 선출됐다.

1980년 9월 25일 총회에서 순천 여수 순서노회를 분립하도록 결의하고 여수노회는 1980년 11월 27일 오전11시 총회장 박치순목사의 사회로 여수성광교회에서, 순서노회는 1980년 12월 2일 벌교제일교회에서 증경총회장 한완석목사의 사회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역사적인 전남 동부지방 3노회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 교세통계에 따르면 본 교단 62개 노회 가운데 순천노회가 2백93개의 지교회로 구성되어 교회 수에 있어 최대 규모의 노회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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