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길 따라 복음이 흐른다

맑은 물길 따라 복음이 흐른다

[ 교계 ] 물길 열린 청계천 따라 복음확장하는 교회들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5년 10월 21일(금) 00:00
지난 1일 복원사업을 마치고 개통한 청계천(淸溪川)을 바라보니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의미가 새삼 실감났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세상이 몰라보게 바뀐 것을 뜻하는 고사성어의 뜻이 이젠 시멘트 바닥이 맑은 시내로 바뀌었다는 뜻으로 쓰일 것 같았다.

   
청계천 주변의 성경 찬송을 파는 기독서점
맑고 투명한 가을,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에 이르는 5.8 킬로미터의 청계천 구간이 도시형 자연 하천으로 복원돼 서울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르지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복원된 하천에는 수심 30 센티미터 이상의 물이 흐르고,나비,방아깨비 등 곤충 모양과 지역적 특색을 형상화한 21개의 교량이 새롭게 들어섰다. 또 벽화,폭포,분수 등을 갖춘 녹지 8만3천여 평이 조성됐으며 도로 옆에는 너비 1.5~3 미터의 산책로가 마련됐다. 그 밖에 3개 구간으로 나뉘어 다양한 광장과 조경ㆍ조명시설을 갖춘 테마공간이 구간별로 들어서 청계천 일대는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속 생태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맑은 물이 흐르기까지 청계천은 오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청계천은 6백여 년을 서울과 함께 해온 터라 항상 시대문화의 중심에 있어 왔다. 정월 대보름에는 광교(廣橋) 등 청계천의 다리 곳곳에서 다리밟기 행사인 '답교(踏橋) 놀이'가 벌어졌고 수표교(水標橋) 주변에선 장안의 아이들이 몰려나와 연을 날리고 쥐불놀이와 돌싸움을 즐겼다. 아낙네들에게는 빨래터로,아이들에게는 물놀이터로 활용되기도 했다.

   
청계천의 야경
그러나 6ㆍ25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청계천은 월남민과 피난민이 모여든 판자촌의 상징이 된다. 58년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판자촌의 힘없는 서민들은 상계,봉천,도봉,신림동 등의 정착촌으로 흩어지고 끝까지 버티던 이들은 군용트럭에 실려 경기도 광주 허허벌판에 내던져진다. 개발이라는 명분의 이면에는 이렇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이 있었다. 판자집이 떠난 자리엔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장사꾼들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6, 0년대 청계천은 섬유 봉제산업을 통한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의 중심지로 한국 경제발전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1970년 11월 13일의 청계천은 한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된다. 당시 평화시장의 재단사였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허리도 펼 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에서 하루 16시간을 기계처럼 혹사당하는 어린 '시다' 소녀들을 대변해 작업시간 단축,건강진단 실시,임금인상,다락방 철폐 등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던 끝에 업주와 경찰의 폭력 앞에 저지당하자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 스물두 해의 짧은 생을 마쳤다.

   
새로 물길이 열린 청계천
이 사건은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교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당시 기독교계는 11월 22일 새문안 교회 청년회가 '죽임의 공모자로서 죄를 참회하는 금식 기도회'를 가졌으며 11월 24일에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정부와 기업인,사회지도자 및 교회를 향한 각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1월 25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기독교방송이 후원하고 한국기독교도시산업선교실무자협의회, KSCF,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공동으로 연동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한국교회에 강한 도전을 주어 이듬 해인 1971년 1월 4일 '한국산업문제협의회'가 출범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기독교는 대 사회적인 발언을 집단적으로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도심 한 복판,상업지구라는 지형적 특성상 청계천 라인으로 교회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서 종사하는 상인들이 중심이 돼 자생적으로 선교회가 조직된다. 1979년 4월 24일,동대문 시장과 남대문시장,평화시장에서 원단과 의류 도매업에 종사하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시장을 복음화,신앙을 생활화'를 목표로 목화선교회(회장:이백훈)가 조직됐다.

당시 초기 창립멤버이며 2대 회장을 역임한 김범렬장로(미암교회)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시장에 있었지만 신앙이 삶으로 드러나지 못했다"며 "주일을 성수하고 '바가지 요금'을 없애 신뢰하는 풍토를 만드는 신앙생활화를 위해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현재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각종 기도회와 신앙훈련을 체계화시켜 수많은 장로를 배출했다 해서 '장로사관학교'라고도 불린다.

목화선교회는 창립 후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기도회와 성경공부,조찬기도회,시장복음화를 위한 전도집회 등 각종행사를 통해 청계천을 영적으로 지켜왔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불어닥친 IMF의 여파는 백화점과 마트에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재래시장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를 위해 목화선교회가 설립한 것이 '21세기 유통경영대학'이다. 유통경영대학은 바야흐로 '열린 청계시대'를 맞이하여 신앙을 바탕으로 그동안 주먹구구식 경영을 벗어나 고개관리와 상품관리를 체계화한 지식정보경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고객에게 친절과 감동 서비스를 제공해 과거 청계천의 영화를 회복하고 지역을 복음화하자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힌지 44년, 복원사업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청계천은 새롭게 태어났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다가 개발이라는 명분에 밀려 쫓겨나고 70년대 산업화 속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효자 지대였지만 그 이면에 노동자들의 인권이 착취되기도 했던…. 영욕의 세월을 끌어안고 있는 청계천은 이제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물과 새 희망이 흐르고 있었다.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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