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주년 맞는 멕시코 한인 이민

1백주년 맞는 멕시코 한인 이민

[ 교계 ] 멕시코 이민 1백년 선교 현장을 가다<상>

김훈 기자 hkim@kidokongbo.com
2005년 05월 03일(화) 00:00
5월 15일이면 우리 선조들이 중미 멕시코 땅에 첫 발을 내린지 1백년이 된다. 1백년 전 유카탄(Yucatan) 반도의 에니껭(Henequen) 농장에서 피와 땀을 쏟으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는 미주한인 이민 1백주년에 비해 너무나 쓸쓸하게 기억되고 있다. 마치 고단한 그들의 삶이 1백년 세월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 왔듯이.

   
에니껭을 자르고 있는 한인 노동자.
1905년 4월 4일 남자 8백2명 여자 2백7명, 아이들 24명 총 1천33명의 한국인이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멕시코로 떠났다. 이들은 1개월 이상의 항해 기간동안 2명이 죽고 1천31명이 멕시코 남부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항에 내렸고, 육로로 다시 북상하여 베라크루즈(Veracruz)에 도착한 것은 1905년 5월 15일로 기록된다.

베라크루즈에서 사흘을 휴식한 이들은 유카탄의 메리다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적은 무리로 나뉘어져 24개의 농장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대부분 에니껭(Henequen) 농장으로 갔고 일부는 시멘트 광산이나 그 외의 개간 사업지로 갔다. 이것이 멕시코 한인 이민사의 시작이었으며, 멕시코 한인 이민은 이 한번으로 끝났다.

당시 멕시코 이민선을 탄 이민자들은 유카탄을 미국 하와이와 같은 수준의 지상낙원으로 알았으나 유카탄의 에니껭 농장은 노예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이민자들 중 일부는 유카탄이 하와이보다 나을 것으로 판단해 이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도 가혹한 학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멕시코와 하와이를 비교하는 글마다 하와이는 지상낙원, 멕시코는 생지옥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메리다시에 거주하는 허훼이(하혜 강하, 은혜 혜)라는 중국인이 한인 노예들의 비참한 실상을 중국인 친구에게 편지로 보냈는데 그 내용이 중국신문에 소개되고 그것을 황성신문이 1905년 7월29일자 사설에서 다루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이 5에서 6등급이고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당시 그곳의 돼지 한 마리 값이 80전이었는데, 한국 노동자 한 사람의 몸값은 불과 30전 정도였다고 한다. 황성신문은 이같은 참상을 보도하고 이틀 후에 정부의 무책임한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는데 이를 계기로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이때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1905년 11월 17일)이었으나 이미 외교 군사권이 일본 수중에 넘어간 것과 다름이 없던 터라 한국 정부에서도 별다른 힘을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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