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인을 사랑한 馬布 목사님"

"한국, 한국인을 사랑한 馬布 목사님"

[ 교계 ] 한국 개척선교사 마포삼열- 4男 헤이워드 마펫 박사 인터뷰 <下>

김훈 기자 hkim@kidokongbo.com
2005년 04월 28일(목) 00:00
   
마포삼열 선교사의 묘비 뒤에 선 4남 헤이워드 마펫 박사 부부(활동이 자유롭던 지난해 가을 서정운목사가 찍은 사진)
【미 산타바바라=김 훈 국장】 마포삼열목사에 대해 취재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가 한국교회사에 알려진 대로 신병 치료차 귀국길에 올랐다가 별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포삼열목사는 일본 총독부의 암살 기도를 피해 아내 루시아 피시 마펫과 막내 아들 톰을 남겨둔 채 급히 귀국길에 올랐으며 한국내 사정이 더욱 악화되면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취재중에 만난 넷째 아들 헤이워드 마펫박사(마포하열)는 이같은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며 "아버지는 한국을 떠날 때 이미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 한 마디에 마포삼열목사의 절절한 한국 사랑이 묻어났다.

일본 총독부가 밀어부치던 신사참배 문제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나선 마포삼열목사는 한국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선교사들 중 가장 중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일본 총독부로선 언제나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것.

일본 헌병에 의해 감시를 받아오던 마포삼열목사에게 암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다 준 사람은 뜻밖에도 일본 총독부 관리의 아내였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자신이 우연히 듣게 된 정보를 평양 선교부에 급히 알려줬던 것이다. 그녀는 사태의 시급성을 알리며 어떠한 환송회나 모임 등을 일절 갖지 말고 무조건 떠날 것을 요청했으며, 마포삼열목사는 일 헌병의 검속을 피해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낮 시간을 택해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황급히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기선 안에서 친 전보를 받고서야 아버지의 귀국 소식을 알게됐다는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는 잠시 피신차 귀국한 미국에서 여러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도했으나 한국내 정세의 악화로 이같은 노력이 번번히 무산되면서 심장 질환이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온 것 뿐 아니라 자신의 평생의 선교 사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상황에 더욱 절망했던 것이다.

   
묘지를 방문, 함께 기도하는 서정운목사 내외 등 한인 교회 방문객.
마포삼열목사의 귀국후 별세하기까지의 3년여 삶에 대해 담담히 입을 연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막내가 돌아온 후 로스엔젤레스 몬로비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집은 당시 창고를 개조한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 집은 정식 번지 등록조차 안돼 00번지 2/1로 명기되었는데 아버지는 이 곳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고 헤이워드 마펫은 증언했다. 당시 형(마삼락)은 신학교 재학중이었고, 자신은 의대 재학중이었으며, 막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의 여유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현재 몬로비아 제일장로교회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은 찾아오는 이 하나없이 역사 속에 묻혀있다.

   
1920년대 초 평양선교부에 모인 외국인 선교사들.
1939년 10월 24일 일주일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결국 숨을 거둔 마포삼열목사의 유해는 그의 처가 동네인 카핀테리아시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현재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의 무덤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난 3월 28일 기자가 서정운목사(미주장신대 학장) 내외와 함께 자택을 방문했을 때 마펫 부부는 거실에서 우리 일행을 맞았다. 헤이워드 마펫은 고령에 폐질환이 겹쳐 의사로부터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실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기자와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그는 아버지 묘지에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것은 마포삼열목사의 미국내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언더우드 등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아버지가 주로 이북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펼쳤기 때문에 분단 이후 평양 선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최근에 마삼락박사(셋째 아들)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서정운목사가 현지를 답사하고 미국내 한인신문이 기사로 다루면서 미국내 한인 크리스찬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게 됐고, 요즘은 가끔 묘소에 꽃을 놓고 가는 참배객까지 생길 정도가 됐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고 마펫박사 부부는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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