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링이필요해 ] 청년 돌봄
백광흠 목사
2024년 05월 29일(수)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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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센티 문턱이라 부른다. 고립은둔청년들이 집 밖, 심한 경우 자신의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 높이이다. 고작 3센티미터도 못 넘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3미터, 30미터처럼 다가올 수 있다. 그 문턱 앞에서 수도 없이 좌절했을 수 있다. 사람들의 두려운 마음을 기꺼이 헤아려 주셨던 분이 우리 예수님 아니셨던가?
고립 청년은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청년, 은둔 청년은 방이나 집 같이 제한된 장소에만 머물며 타인과 교류가 거의 없는 청년을 말한다. 보통 이 같은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면 '고립은둔청년'으로 분류한다.
#청년 고립·은둔 문제는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202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립은둔청년은 54만 명에 이른다. 일본 사회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직면했다. 일본에서 고립 청년들은 이제 50대 중장년이 되어 50대 자녀와 80대 노부모의 세대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고립은둔청년은 부모 사회에서도 말하기 힘든 문제이다. 이것은 한 가정을 무너뜨린다.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는 청년 비율이 78%에 달한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세대를 넘어서 고립은 고독사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립을 사회적 문제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결국 청년은 이 사회의 임박한 미래 아닌가?
청년들이 고립과 은둔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가족들은 갑자기 저런다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청년들의 내면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자살은 10대부터 30대 연령층의 가장 높은 사망원인이다.
한 사회의 분위기가 응축되어 적나라하게 전달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학교 교실이다. 어른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열망과 욕망은 학교 교실에 그대로 투영된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가치와 욕망에 노출되고 그 속에서 숨쉬며 자란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 사회에 던져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년들의 고립 은둔의 문제를 그들 개인 성향이나 정서 문제로만 귀결해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가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주제인 것이다.
#한무리교회, 고립은둔청년 선교지원실 조직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역을 시작한 안양노회 한무리교회는 작고 소박하고 평범한 교회이다. 교우들은 정직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바 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겉모습과 속마음이 어긋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자그마한데 지난 40년 가까이 지역사회 안에서 해 온 일들을 보면 아, 참 놀랍다, 위대하다 생각이 든다. 장학회로, 지역아동센터로, 청소년오케스트라로, 발달장애아동센터로, 어린이 무료식당으로 지역사회와 어려운 형편의 아동 청소년 가정들을 섬겨 왔다.
관악단 청소년들은 교회를 다니던 아니던 악기를 배우기 위해 매일 교회를 찾는다. 교회를 싫어하는 아빠들도 아이들이 연주가 있는 날이면 기꺼이 예배당에 들어선다. 이 아이들 중 누군가에겐 방에만 틀어박힌 형, 오빠가 있었다. 고립은둔 청년이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시기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 이야기인 것이다.
청년들을 돕기 위해 교회는 '고립은둔청년 선교지원실'을 조직했다. 지원실에 목회자 상담학교수 사회복지사 음악치료사 동아리를 운영할 청년 멘토들이 모였다. 그중에 특별하고 중요한 친구들이 있다. 바로 고립과 은둔 경험을 직접 겪었던 청년들이다.
병옥(가명)이는 4년 동안 방 밖을 나오지 않았다. 보름에 한 번 고요한 예배당에서 나와 한 시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처음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 대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너 마디 나누고 우두커니 있다가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보름에 한 번 세상으로 나와 준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왜 멈춰 섰느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에 함께 있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6년을 만났다. 그는 이제 세상과 함께 살아간다. 그가 입을 열 때 선교지원실의 모든 스태프들은 귀를 기울인다. 청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려주는 생생한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오늘, 안녕'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고립청년지원실은 청년들의 상태에 따라 세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가능하면 그들을 또래 모임이나 커뮤니티로 초청한다. 필요하면 전문상담가와 만남을 주선한다. 집 밖으로 전혀 나오지 못하는 청년들에게는 SNS를 통해 매일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그 프로그램 이름을 '오늘, 안녕'이라고 붙였다. 오늘 하루를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다. 오늘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원실 스태프로 있는 상범(가명)이는 일본 유학 중에 그 열병을 앓았다. 처음엔 두렵고 불안해서 방 안으로 숨어 들었다. 숨어 들면 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더 큰 불안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때 이웃 동생이 놀러오기 시작했다. 타국에서 온 낯선 형이 편했던지 그는 상범이의 방 안에서 한참을 게임하다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삼사일에 한 번씩 이웃 동생은 방문을 두드렸다. 무심한 그 방문이 상범이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했다. 그 동생이 '오늘, 안녕'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 방 안에 숨어든 청년들을 무슨 수로 도울 수 있냐고 반문한다. 평생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했던 의사 제럴드 메이는 말했다. "모든 인간은 사랑에 굶주리면서 삽니다. 너무 깊어 표출이 안 될 뿐, 사람은 늘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며 삽니다. 확신하게 된 한 가지는 인간은 그 갈망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청년들은 그러나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년들을 도울 수 있는 희망의 근거이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선교지원실의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은둔 중이지만 누군가와 연결 되고 싶은 당신을 기다립니다."
고립은둔청년을 돕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그 모든 것,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고 햇볕을 쬐고 사람을 만나고 잠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대견하다 말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그렇게 무너진 마음을 토닥여 주는 것 아니겠는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버텨 낸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테니까.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세요. 강물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장 루슬로)
백광흠 목사 / 한무리교회
고립 청년은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청년, 은둔 청년은 방이나 집 같이 제한된 장소에만 머물며 타인과 교류가 거의 없는 청년을 말한다. 보통 이 같은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면 '고립은둔청년'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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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립은둔청년은 54만 명에 이른다. 일본 사회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직면했다. 일본에서 고립 청년들은 이제 50대 중장년이 되어 50대 자녀와 80대 노부모의 세대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고립은둔청년은 부모 사회에서도 말하기 힘든 문제이다. 이것은 한 가정을 무너뜨린다.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는 청년 비율이 78%에 달한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세대를 넘어서 고립은 고독사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립을 사회적 문제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결국 청년은 이 사회의 임박한 미래 아닌가?
청년들이 고립과 은둔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가족들은 갑자기 저런다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청년들의 내면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자살은 10대부터 30대 연령층의 가장 높은 사망원인이다.
한 사회의 분위기가 응축되어 적나라하게 전달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학교 교실이다. 어른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열망과 욕망은 학교 교실에 그대로 투영된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가치와 욕망에 노출되고 그 속에서 숨쉬며 자란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 사회에 던져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년들의 고립 은둔의 문제를 그들 개인 성향이나 정서 문제로만 귀결해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가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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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역을 시작한 안양노회 한무리교회는 작고 소박하고 평범한 교회이다. 교우들은 정직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바 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겉모습과 속마음이 어긋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자그마한데 지난 40년 가까이 지역사회 안에서 해 온 일들을 보면 아, 참 놀랍다, 위대하다 생각이 든다. 장학회로, 지역아동센터로, 청소년오케스트라로, 발달장애아동센터로, 어린이 무료식당으로 지역사회와 어려운 형편의 아동 청소년 가정들을 섬겨 왔다.
관악단 청소년들은 교회를 다니던 아니던 악기를 배우기 위해 매일 교회를 찾는다. 교회를 싫어하는 아빠들도 아이들이 연주가 있는 날이면 기꺼이 예배당에 들어선다. 이 아이들 중 누군가에겐 방에만 틀어박힌 형, 오빠가 있었다. 고립은둔 청년이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시기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 이야기인 것이다.
청년들을 돕기 위해 교회는 '고립은둔청년 선교지원실'을 조직했다. 지원실에 목회자 상담학교수 사회복지사 음악치료사 동아리를 운영할 청년 멘토들이 모였다. 그중에 특별하고 중요한 친구들이 있다. 바로 고립과 은둔 경험을 직접 겪었던 청년들이다.
병옥(가명)이는 4년 동안 방 밖을 나오지 않았다. 보름에 한 번 고요한 예배당에서 나와 한 시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처음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 대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너 마디 나누고 우두커니 있다가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보름에 한 번 세상으로 나와 준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왜 멈춰 섰느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에 함께 있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6년을 만났다. 그는 이제 세상과 함께 살아간다. 그가 입을 열 때 선교지원실의 모든 스태프들은 귀를 기울인다. 청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려주는 생생한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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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청년지원실은 청년들의 상태에 따라 세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가능하면 그들을 또래 모임이나 커뮤니티로 초청한다. 필요하면 전문상담가와 만남을 주선한다. 집 밖으로 전혀 나오지 못하는 청년들에게는 SNS를 통해 매일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그 프로그램 이름을 '오늘, 안녕'이라고 붙였다. 오늘 하루를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다. 오늘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원실 스태프로 있는 상범(가명)이는 일본 유학 중에 그 열병을 앓았다. 처음엔 두렵고 불안해서 방 안으로 숨어 들었다. 숨어 들면 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더 큰 불안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때 이웃 동생이 놀러오기 시작했다. 타국에서 온 낯선 형이 편했던지 그는 상범이의 방 안에서 한참을 게임하다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삼사일에 한 번씩 이웃 동생은 방문을 두드렸다. 무심한 그 방문이 상범이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했다. 그 동생이 '오늘, 안녕'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 방 안에 숨어든 청년들을 무슨 수로 도울 수 있냐고 반문한다. 평생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했던 의사 제럴드 메이는 말했다. "모든 인간은 사랑에 굶주리면서 삽니다. 너무 깊어 표출이 안 될 뿐, 사람은 늘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며 삽니다. 확신하게 된 한 가지는 인간은 그 갈망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청년들은 그러나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년들을 도울 수 있는 희망의 근거이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선교지원실의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은둔 중이지만 누군가와 연결 되고 싶은 당신을 기다립니다."
고립은둔청년을 돕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그 모든 것,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고 햇볕을 쬐고 사람을 만나고 잠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대견하다 말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그렇게 무너진 마음을 토닥여 주는 것 아니겠는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버텨 낸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테니까.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세요. 강물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장 루슬로)
백광흠 목사 / 한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