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에서 온 초대

산골짜기에서 온 초대

[ 주간논단 ]

김창근 목사
2023년 06월 27일(화) 10:00
은퇴의 상실감도 서서히 잊혀 가던 무렵이다. 한 산골짜기에서 초대를 받았다. 제주 남단 상천리 깊은 산 속의 방주교회를 섬겨달라는 제안이다. 방주 예배당은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유작이다. 그는 건축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세계에 드러나는 새로운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한다. 제주를 대표하는 예술적 건축물로 알려져 매일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온다. 주일에는 예배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건축물이 주는 영감과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젖어 감동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방주 교회의 참된 영적 아름다움과 가치는 인적이 끊어지고 황혼이 깃들면서 시작된다. 산골짜기를 장엄한 황혼의 빛으로 물들이고 어둠이 깔리면 짙은 외로움과 고요함이 찾아온다. 어둠이 산을 뒤덮어 고독이 가득하면 이곳이야말로 깊은 영적 능력과 생명으로 충만한 광야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절망과 고독, 귀양살이의 절해고도의 땅이었음을 회상하게 된다.

깊은 산골짜기에서의 2년은 광야의 축복으로의 초대였다. 광야는 수도자 안토니우스가 평생을 산 곳이다. 광야에서 그는 고독 속에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피상적인 안정의 껍질을 벗고,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지도를 베풀었다. 광야는 거짓된 자아를 비워 새로운 자아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자아에서 비로소 진정한 사역이 흘러나온다. 토마스 머튼은 지적한다. "현대 사역자들이 세상에서 표류하며 사회의 신조와 가치관을 수용하며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과 인기가 된 산만한 세상 속에서 사역자들이 마음과 생각과 삶을 성찰하는 일을 잃어버린다. 결국 시류에 떠밀려 힘과 인정 욕구에 함몰되어 거짓된 성공의 탑을 쌓아간다. 그래서 초대 교회 수도자들은 광야라는 고독의 자리로 피해 들어갔다. 그곳에서 침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자기 영혼과 교회를 구원하였다. 위기 속에 표류하는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있기 위해 고독이란 광야로 들어가야 한다. 고독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려 하지 않는 교회는 자신을, 자신과의 만남을 외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처럼 그냥 존재하는 대신 늘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가 구하는 구원과 안식은 하나님 안에만 있기에 고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칠흙 같이 깊은 밤과 고요한 새벽, 방주교회는 깊은 침묵이 깃들어 있다. 이곳에서의 기도는 침묵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요 신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면 침묵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방주교회의 설립 목적은 순례자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순례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보석인 침묵이다. 침묵으로 순례의 여정은 시작된다. 그래야 풍요와 성장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세상에 생명의 물줄기를 흘려보낼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시려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침묵하셨다. 왕자에서 양치기가 된 모세는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세가 침묵 속에서 기다림을 배웠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A. W. 토저는 오늘의 교회를 향해 권고한다. "우리의 영성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의 훈련이다. 침묵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순례란 곧 침묵이다. 광야의 수도자들은 침묵이 영원을 내다보는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하며 하나님의 침묵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때도 그들은 영원한 침묵에서 들은 말로 섬겼다. 침묵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만이 새로운 구원과 생명을 낳는다. 오늘의 교회는 침묵으로 들어가기 위해 광야의 시간을 스스로 가져야 하리라.

헨리 나우웬은 '마음의 길'에서 종말로 치닫는 이 시대에서 어떻게 사역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오늘날 계속되는 위기와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이 날로 깊어가는 이때 교회의 사역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홀로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고독과 침묵으로 이끄는 깊은 산골짜기의 초대가 오늘의 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요구된다.



김창근 목사/무학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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