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서 '주여' 로

엄마에서 '주여' 로

[ 미션이상무! ]

윤대운 목사
2023년 06월 14일(수) 15:53
지난 2018년 특전사 군종장교들이 군 훈련 중인 첫 강하자들과 동참하기 위해 특수전학교에 집결했다.
윤대운 목사.
쨍그랑하는 소리 직전에 들린, “주여!!”라고 외치는 아내의 한 마디는 내게는 불편한 것이었다.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에서의 나의 감탄사는 “악!”, “엄마야”, “아흑”, “아이고야” 등등 다채롭긴 하지만 어느 하나 목사다운 것이 없었다. 갈릴리 바다의 배 안에서 제자들이 간절히 예수님의 도움을 기다렸더라면, 그들이 인영을 보고 외친 것은 “주여! 주님 아니십니까!?” 였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온통 두려움밖에 없었고, “히익! 유령이다!”라는 감탄사밖에는 내뱉을 수 없었다. 딱 내 수준이 그런 것 같았다. 아내의 “주여!”는 그래서 종종 나의 자격지심으로 이어진다.

초임 때도 그랬다. 최전방 소초의 예배를 위해 올라가는 레토나에는 어김없이 초짜 운전병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혜로운 수송반장님 덕이었다. 어떤 실수가 있다고 해도 목사님은 친절하게 대해 줄 것이라는 반장님의 계획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나는 침착하고 친절한 척을 하며, 운전병 형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괜찮아요. 다시 시동을 걸면 될 거예요.” 사실 침착이니 친절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급한 커브로 올라가는 경사로에서 시동이 꺼진 채로 차량은 멈추어 서버렸고, 브레이크의 유압은 두 번의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뒤에 있는 커브길 너머는 낭떠러지. 상황이 이러니 침착하고 친절한 척하며 부드럽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예상대로였다. 시동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브레이크의 유압이 풀려버린 차량은 급속도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주여!!” 외치다가 살아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없이 설교에서 인용할만한 ‘인생의 예화’가 되었을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때 한 글자만 외쳤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하나님께서 경사로의 가드레일에 튼튼함을 더해주셔서 죽지 않게 해주신 이후 6년이 지났다. 그때의 나는 앞뒤로 낙하산을 맨 채, 거대한 헬륨 기구를 타고 300미터 상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특수전사령부의 군종목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에서 모인다. 그리고 낙하산 훈련을 받고 처음 강하(점프)를 하는 교육생들과 함께 강하를 한다. 우리의 역할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교육생들을 위해 강하 전 안전기도를 해주는 것. 그 다음으로 최대한 ‘편안하게’, ‘여유있게’ 함께 올라가 먼저 점프하는 것이다. 앞사람이 편안하면 뒷사람이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다. 만약 앞사람이 주춤하게 되면, 뒤는 사색이 된다. 그래서 여유있게 미소를 유지하며 편안하게 먼저 뛰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그때에 내 뒤의 한 교육생이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목사님, 죄송한데, 기도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안됩니까?” 그 말에 돌아본 나의 얼굴이 미소였는지, 떨리는 입꼬리였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그러나 했던 말은 기억한다.

“아까 했잖아요..”

나의 멋진 군목 선배들처럼 자연스럽고 자신감있게 “주여!”하고 한번 더 기도해줬더라면, 그것 또한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리가 되었을 텐데. 두려움에 압도된 내 입술은 여전히 아쉬웠다.

그러나 ‘군종목사 10년이면 위급상황에 주님을 읊는다’했던가. 분기마다 이루어지는 공수부대의 강하훈련에 동참했던 때였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예비낙하산이 먼저 펴져버렸다. 예비낙하산은 주낙하산처럼 천천히 펴지지 않는다. 위급상황에 구명을 위한 용도로 급속도로 펴진다. 몸소 체험해 보니(?) 과연 그러했다. 펴지는 예비낙하산은 비행기의 속도만큼 큰 충격과 함께 나를 낚아채갔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려보니 상황은 금방 파악이 되었다. 두 개가 펴진 것이다. 비행기 동체에 긁혀서 반파된 예비낙하산과 제대로 펴진 주낙하산. 낙하산이 두 개면 더 안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쪽 계통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낙하산은 하나이고 두 개 일 수 없다.’ 두 개의 낙하산이 펴지게 되면 회전을 일으키거나 서로가 감겨서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을 받을 때에는 주낙하산을 분리하는 훈련도 받는다. 그러나 내 상황은 낙하산을 분리할 수도 없었다.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금이가서 왼팔은 올릴 수도 없을 뿐더러, 예비낙하산은 애초에 분리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주낙하산을 분리한다면, 이미 반파된 예비낙하산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대단히 안좋은 상황임을 몇 초 만에 직감한 뒤, 내 입에서 처음 튀어나온 말은 몇 년을 기다려온 제법 기특한 것이었다.

“주여”

갈릴리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듯, 내게 그 때, 바람을 잔잔케 하셨다. 낙하산은 사뿐히 나를 수풀에 내려놓았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나를 살리신 것도. 성장케 하신 것도.

“함께하라”는 군종사역의 모토가 되는 말이다. 이 말에 몸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위험을 감수할 일이 생겨난다. 그러면서 여전히 느낀다. 우리는 그저 잠깐동안 함께 하는 순간으로 인해 위험을 경험하지만, 대다수의 전투를 위한 군인들은 항상 위험에 놓여 있음을. 전후방 각지에서, 바다와 하늘과 먼 타지에서 많은 군인들이 나라지킴의 대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가장 먼저 “주여!” 외쳐줄 수 있는 군종목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배우고 있다. 또한, 가장 바란다. 나의 입술로 만이 아닌 그들 자신의 입술로 그 어느 순간에 “주여!” 외칠 수 있기를.

윤대운 목사 / 3사단·육군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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