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길, '고통 감수성'

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길, '고통 감수성'

[ 8-9월특집 ] 6.포스트 코로나 시대 목회를 위한 '고통 감수성'의 문제

김희헌 목사
2020년 09월 08일(화) 08:01
문명의 전환기에서 우리는 그간의 생활방식에 대한 성찰 속에서 '뉴노멀'을 찾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고통이 닥쳐옴으로써 삶의 방식과 제도를 새로 짓는 노력을 아니 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그동안 소비주의에 기초한 산업 문명과 공동체적 유대를 망쳐온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일을 유보해왔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현재의 고통이 마치 타자의 운명과 무관한 듯이 살아온 그간의 삶에 대한 형벌 같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 시대를 가리켜 '역사의 웜홀'(wormhole)이라 표현한다. 웜홀은 우주의 시공간을 잇는 가상의 터널로 알려진다. 역사의 웜홀이란, 앞으로의 시대가 인류의 가능성을 모두 빨아들인 블랙홀에 이를지, 불평등한 신자유주의 질서를 벗고 새로운 사회로 도약하는 화이트홀로 나아갈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 너머에는 분명히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암시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간의 생활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며 '뉴노멀'을 분주히 찾고 있다. 비대면(untact) 시대 행위규범으로서의 뉴노멀만이 아니라, 문명전환을 이룰 체제구상으로서의 뉴노멀도 필요하다. 행위규범으로서의 뉴노멀이 새로운 일상문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체제구상으로서의 뉴노멀은 근대적 삶의 방식을 청산하기 위한 총체적 기획이라 하겠다.

근대정신의 기초를 놓은 데카르트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실체'(substance)라고 지칭했고, 그 특징을 개별 독립성 즉, '자기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개체적 존재 방식에서 찾았다. 그의 사상을 근대정신의 기초로 삼는 순간부터 어쩌면 서구의 근대문명이 나갈 길은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철학에 입각한 근대과학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atomism)을 복귀시켜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입자의 충돌로 이해하면서, 근대적 생활양식이 개인주의와 적자생존의 방식으로 구축될 정신적 토대가 조성됐다 하겠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과 분리된 인간' 그리고 '세계와 분리된 신'을 연상하게 된 근대정신은 한편으로는 신 없이도 가능해진 무신론적 삶을 상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신에 관한 무자비한 교리도 만들어냈다. 근대적 무신론과 유신론 모두 개별화된 인간과 신에 관한 사고습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위기를 신의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유신론이든, 그런 일은 없다고 보는 무신론이든 간에, 삶을 스스로 건사해야 한다는 뼈저린 개인주의로 얼룩진 문명을 극복하는 일에는 무력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중에, 우리는 만물의 연관 관계를 새삼 느끼면서 상호 책임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바이러스 감염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진실과 마주했다. 그건 인류의 삶을 구성하는 거대한 연결망에 관한 것이다. 너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너의 질병이 너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느낌과 감각이 그간 익숙해서 간과해오던 약자들의 고통을 재발견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이 경험이 쌓여서 적자생존의 문명을 넘어설 지혜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아무튼, 위기가 새로운 인간을 낳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적 고통'을 느끼는 감각으로서의 '고통 감수성'이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본원적 동력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당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신음에 응답하는 행동을 하는 일이란 기적이다. 공동체의 미래가 거기에 달려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솟아난다.

이에 대한 반면교사로 최근에 불거진 '전광훈 현상'은 타인의 피해에 아랑곳없이 자기 신념에 몰두한 종교집단의 기묘함을 보여준다. 이들을 향해 쏟아진 사회적 환멸은 마치 개신교 자체에 대한 사망선고 같다. 이런 시대적 절망을 이겨내고 평화(shalom)와 사랑(agape)에 충동하는 감각을 지닌 영혼을 교회의 품에서 길러낼 수 있을까? 극단적 열정을 따라 춤추지 않으며, 중요성을 분별하는 절제를 지니며, 은총의 세계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고요함을 품은 영혼이 등장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광풍과 종교의 수치가 씻기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시대를 풍미해온 사상만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위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흘러온 포스트모던의 정신풍토는 상품성에 민감한 깨알 같은 지성에 만족하며, '존재와 역사와 신'과 같은 큰 물음(거대담론)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다.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범람이 결국 자기주장의 알리바이로 왜소화된 탈-진리 시대(the post-truth era)로 귀결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피조물을 향한 '고통의 감수성'을 기르는 일에는 미흡하다.

다행스럽게도 존재의 무게에 이끌린 영혼은 어느 시대든 그루터기로 남아 있다. 한국교회 역시 그러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코로나 시대의 위기와 회의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고통 감수성'의 눈으로 현실을 읽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안다. 각자의 욕망이 신이 되어버린 시대를 극복하려면, 이웃의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생명 속에서 신의 부름을 듣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

기독교는 오랫동안 그것을 배워왔다. 기독교는 중세적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자선(charity)의 신앙과 근대적 에고이즘에 기초한 거래(trade)의 신앙을 모두 거치면서, 결국 시간이 흐르면 그런 달콤한 유혹이 영혼의 몰락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귀족적 잉여감정이 이끄는 중세적 나르시시즘이나 상인의 계산을 닮은 근대적 에고이즘에 붙어사는 종교는 결코 인간의 영혼을 이끄는 일에서 주도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늘의 지성은 분명히 안다.

교회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신앙과 선교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 감수성에 입각한 생태신앙과 역사의 고통에 참여하는 평화선교이다. 생태신앙이란 회개와 상생을 중시하는 신앙 즉, 풍요와 소비에 젖은 삶을 회개하고 모든 생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펼쳐낸 활동이 평화선교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목회는 남을 꺾고 자기 왕국을 넓히는 선교가 아니라, 저마다 지닌 생명의 아름다움이 상생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어두울수록 아침이 가깝다 했던가? 한국교회의 건투를 빈다!



김희헌 목사/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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