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떠나는 이유가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는 이유가 있다

[ 주간논단 ]

오시영 장로
2019년 10월 08일(화) 09:54
젊은이가 몰려들지 않은 종교는 이미 세상의 거울 기능을 상실한 종교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다. 신자가 없는데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는가? 까닭에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건 어찌할 수 없는 진실이다. 젊은이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기독교 지도자들이 혹독한 자기 회개를 해야 할 시간이라고 하겠다. '왜?'를 끊임없이 자문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하지만 지도자들이 편협한 우물 안 개구리식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기독교는 축소되고 말 것이다. 이런 글이 심히 조심스럽지만 누군가는 현실을 아프게 말해야 하고, 한국기독공보는 죽어가는 기독교의 예방주사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광야에서 40일간 예수께서 연단의 시간을 보낼 때 세상은 귀를 막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을 통해 세상을 깨우고 그 완성인 십자가의 신비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최근 서울에서는 광화문집회라 불리는 보수단체의 군중집회와 서초동집회라 불리는 진보적 입장의 군중집회가 번갈아 개최됐다. 두 군중집회의 극명한 차이 중 하나가 전자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고, 후자에는 넘쳐났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부부가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족 단위로 참가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전자의 모임 한 축에는 일부 기독교단체가 있었고, 그 단체가 주창한 구호 속에 선동적 정치구호가 넘쳐났다는 것이 세상의 평가다. 물론 진정한 기독교는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류 역사 이래 형성돼 온 문화의식에 기초한 객관적 평가는 함부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문화의식에는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끼쳐온 기독교 사상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사는 것은 젊은이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쪽은 희망적이다. 과거를 살아온 어르신 세대가 아무리 미래를 염려해도 미래의 주인은 현재의 젊은이지 어르신이 아니다. 주인 아닌 자들이 주인인 자들을 선도하려는 것은 오류 중의 오류이다. 어르신세대, 필자세대는 대학 진학률이 10%가 되지 않았다. 지금 젊은이들은 80%가 대학을 다닌다. 물론 대학 교육이 전부는 아니다. 어르신세대는 유교철학과 기독교사상 등 종교적 가르침이 지배적인 세대였기에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이 지금 세대보다 뛰어났지만, 지적인 가르침과 그에 기초한 각종 정보에 대한 접근과 분석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필자의 판단이다. 젊은이들은 한국이라는 협소한 지역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세계적이다. 인류 속의 한 인격체이고, 세계 속의 한 존재들이다. 우물 안 개구처리처럼 살았던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성장해 온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높은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예수의 성경 속 가르침은 항상 진보였다. 예수는 당시 약자였던 어린 아이와 과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의 편이었다. 나사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의 정신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설파하신 한 마디에 압축돼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근본은 보수였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하늘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기독교는 지나치게 보수에 편중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실천적 정의였던 진보적 가치를 지나치게 적대시한다. 보수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광대무변한 진리지만, 그 현실적 이행은 진보의 실천적 행함에서 구해져야 한다.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약하고 부족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예수의 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부른 부자의 모습으로 바늘귀 앞의 낙타가 돼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하겠다.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교회를 간절히 소망한다. 분열이 아닌 통합을, 배척이 아닌 포용을 앞장서서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오시영 장로 / 상도중앙교회·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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