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공보는 오랜 세월 함께 한 선교동역자"

"한국기독공보는 오랜 세월 함께 한 선교동역자"

[ 한국기독공보주일에 만난 사람 ] 대만선교의 산 증인 김달훈 선교사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9년 04월 08일(월) 07:50
"대만에서의 선교 사역을 한국기독공보를 통해 국내에 소개할 수 있었죠. 한국기독공보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귀한 '공보(公報)'입니다. 앞으로도 귀한 사역 잘 감당하시길 기도합니다."

1979년 3월 대만에 파송되어 은퇴 후에도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김달훈 선교사는 본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지난해에도 본보가 종이 신문을 디지털화 하는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내 몫을 스스로 감당해야 겠다"며 기금 모금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 선교사가 대만에 갔을 때는 미국과 중국이 1978년 국교수립을 하고 대만과 단교를 단행했던 불안하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실제로 그는 순교까지 각오했다고 한다.

김 선교사가 부임한 한인교회는 낡은 연립식 주택으로 벽과 강대상을 놓은 마루가 썩어들어가고 있을 정도로 낡은 곳이었다. 2층 목사관은 비가 오면 새서 밤새 잠자리를 옮겨다녀야 했다.

"주님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종을 이곳에 보내셨는데 제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기도하는 중에 그는 선교의 청사진을 세우게 됐다. 그것은 '새성전 건축, 대륙선교회 훈련원 건축, 산지 원주민 선교, 유학생 선교'였다.

먼저 교회건축을 위해 김 선교사는 당시 평양노회에서 보내주던 월급 300달러를 모두 월정 건축헌금으로 내겠다고 선포했다. 사실 한달 생활비로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의 이러한 헌신과 모금활동 덕에 1984년 타이페이 중심부에 교회 건물을 짓고, 구교회당은 대륙선교회 훈련원으로 개조해 완공했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말로 다하지 못하는 어려움과 고뇌가 있었지만 때마다 은혜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김 선교사의 고백이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원주민 선교를 감당해왔다. 미개하고 가난한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그는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곳으로 차를 몰아 이들을 돕고 교회를 세웠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정년퇴임하더라도 산지를 다니면서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게 좋지 않겠냐고 해서 지금도 6곳을 순회 선교 하고 있다"며 "원주민들을 위해 지금까지 지원한 금액만 200만불 가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학생들을 위한 '김치 깍두기 애찬 선교'도 진행했다. 아내가 금요일이 되면 용달차에 배추를 사서 김장을 하고, 곰탕을 끓였다. 이 소식이 교민들 사이에 전해져 나중에는 가톨릭 교인, 스님까지 곰탕을 먹으러 왔다고.

그는 애국적인 선교를 했던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 88올림픽 당시에는 재중 한인 올림픽 후원회 회장을 맡아 1000년 묵은 홍해목을 구해 목각 호랑이를 제작했다. 무게 2톤의 호랑이를 만들어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기증해 회관에 전시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대만과 단교를 하는 통에 대만 내 타이페이 한인초등학교에는 돌이 날아오고, 한국인에게는 택시 승차 거부를 할 정도로 반한 감정이 심해졌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타이페이한인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후원회 이사장 및 재건축위원장을 맡아 학교를 살리는 일에도 큰 공로를 세웠다.

그의 이러한 애국적인 헌신을 인정해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8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대만에 거주하며 선교사역을 펼치는 김 선교사는 "2004년 퇴임을 하고 해외 선교사로서 원로추대를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은퇴 이후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베풀며 살 수 있는 축복의 길이 열려 감사하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기독공보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시도하는 일들이 귀한 열매를 맺기 바란다"며 "앞으로도 정론직필하며 시대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바른 언론의 역할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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