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 밑에 건물주'

'조물주 밑에 건물주'

[ 목양칼럼 ] 강건상 목사2

강건상 목사
2019년 03월 15일(금) 11:36
필자가 처음 교회를 개척할 당시 어떤 자본이나 재정적 지원 없이 예배장소를 구하러 나섰는데, 다행히 지인의 배려로 작은 공간에서 소정의 비용만 지불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지인이 여러 번거로운 일들을 감수하며 베풀어준 은혜는 개척 초기의 필자에게 충분한 격려와 응원이 됐다.

시간이 흘러 상가건물을 임차해 교회 간판을 걸고 예배드릴 수 있게 됐고, 그 때 느꼈던 소박한 행복감과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나중에 건물주가 주변 대형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내심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건물주가 신앙인이라는 안도감은 그야말로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에 불과하다'는 것이 얼마 가지않아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누군가 문 넘어로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주였다. 그는 자신의 차고 앞에 세워진 차가 우리 교인의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로 인해 자신이 새벽기도에 늦게 될 것에 대한 분을 그렇게 표현했다. 다른 교회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를 자신의 예배에 불편함을 줬기 때문이란 이유로 정당화했다.

신자인 건물주에게 받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지하층에 포교원이 잇따라 들어오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일부는 '떳다방' 형식으로 단기간에 물건을 팔고 빠지는 장사꾼이었는데, 주업이 무엇이든 외관상 교회 아래 타종교 시설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로는 지하에서 피우는 향 냄새가 건물 전체를 둘러쌌고, "한 건물에 교회와 절이 함께 있네"라는 동네 사람들의 실소를 듣기도 했다.

다시 지하실이 공실이 된 후 얼마 있다가 건물주가 필자를 찾아왔다. 지하에 교회가 들어와도 되겠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포교원이 들어올 때는 한 번도 양해를 구하지 않던 건물주가 이번에는 물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타종교는 상관 없지만 교회는 같은 시설이라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필자는 절보다는 백번 낫다고 생각했기에 환영한다고 대답했다.

필자가 경험한 이 '웃픈(웃기면서 슬픈) ' 건물주의 태도는 우리 시대 신앙인의 씁쓸한 자화상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과도 타협할 수 있고, 종교적 위안을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말이다. 세간에 떠도는 말 가운데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표현이 생각날 정도였다.

상가에 들어선 교회가 좋은 건물주를 만나는 것도 목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은혜 중 하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애쓰는 수많은 상가교회를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조물주 밑에 건물주'가 늘어나길 소원해 본다.

강건상 목사 / 세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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