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용서로 반공의식 넘어서서

화해와 용서로 반공의식 넘어서서

[ 논설위원칼럼 ]

한경호 목사
2019년 02월 25일(월) 15:56
천하대세(천하大勢) 합구필분(合久必分) 분구필합(分久必合). 삼국지의 첫 문장이다. 천하대세는 합한 지 오래되면 나누이고 나누인 지 오래되면 합하게 된다는 뜻이다. 남북이 나뉜 지 74년이 되었다. 이제 다시 합해야 하는데 그 때가 언제일까?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 북미 간에 평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왔고 며칠 전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에서 열렸다.

필자는 목사의 아들로서 부모의 고향이 평북 의주인 월남민 2세이다. 6·25전쟁 중 제주도로 피난가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의식을 갖고 성장했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는 5·16군사정부 하에서 살았고,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사건 등을 겪으면서 자랐다. 그리고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반공의식은 정말 철저하다.

언제까지 이래야할까? 6·25전쟁을 겪은 지 70년이 되어온다. 이제 목회자들 중에 6·25를 직접 겪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반공의식이 교회 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인가? 월남민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반공의 보루가 되어 있는 것인가? 이제 생각을 좀 달리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첫째, 반공은 역사적 퇴행물이다. 1970년대에 이미 이데올로기 시대가 종언을 고했고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세계의 냉전체제는 해체되었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주무대에서 사라진 실패작이다. 이 실패작에 대한 적대의식으로 민족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다. 부모세대가 겪은 고난과 아픔에는 공감해야겠지만 그것이 미래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밑거름으로 사용될 때에 참된 가치가 있다.

둘째, 반공의식은 성경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식이다. 반공은 북한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향한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유발하는 정말로 반(反)성경적인 의식이요 감정이다. 감정풀이는 될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과 평화의 정신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반공을 더 우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고 하겠다.

이제 우리에게는 과거에 발목 잡혀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새로운 미래는 우리의 두 어깨에 달려있다.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증오와 적개심으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동포를 적대하면서 이 분단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화해와 용서의 능력으로 반공의식을 넘어서서 평화와 통일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판단을 위해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민족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예언서를 제대로 읽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반공의식은 예수님 당시를 지배한 율법주의자들의 의식 구조와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공격하고, 그를 율법의 파괴자, 체제전복자로 몰았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반공주의 지배자들 역시 반공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민주화 세력을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처형하였다. 율법과 반공은 자신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휘두른 살생의 칼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역사의 발전은 과거를 성찰하고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월남 1세들의 반공의식과 적대감은 직접적인 피해와 상처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이해의 여지가 있지만 월남 2~3세대와 그 외의 사람들은 좀 달리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보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신앙으로 앞을 응시해보자. 율법과 반공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가 보이지 않는가?



한경호 목사/횡성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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