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민족의 운명을 바꾸다

한국교회, 민족의 운명을 바꾸다

[ 주필칼럼 ]

변창배 목사
2019년 03월 01일(금) 10:00
한국교회는 민족의 운명을 바꾼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이다. 1712만 조선인의 1.3%에 불과한 한국교회가 민족사를 바로 세우는 기틀을 제공했다. 덕분에 한국교회는 수난을 통해서 민족사랑의 DNA를 지니게 되었고, 한민족으로부터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신뢰를 받게 되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당시 청년기독인들은 신한청년당을 통하여 창조적 소수자로서 3.1운동의 길을 예비하였다. 1918년 8월에 상하이에서 설립되어 3.1운동 전후에 큰 활약을 한 신한청년당은 창립 때부터 청년기독인들이 중심에서 이끌었다. 이를테면 신한청년당 설립 대표 겸 총무 여운형은 배재학당과 상동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키웠다. 여운형은 1907년부터 10년까지 승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1911년부터 2년 동안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3.1운동 이후 가담한 서병호는 서경조 목사의 차남으로 훗날 새문안교회의 원로장로가 되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원학교의 첫 학생이었다.

신한청년당은 설립자 6명을 포함하여 30~50명이 참여한 소규모 청년독립운동단체였으나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담당했다.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중국을 방문한 미국 윌슨 대통령 특사 크레인을 통하여 미국대통령에서 독립청원서를 보냈고, 1919년 1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미주나 일본, 연해주 등지에서도 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시도했으나 유일하게 신한청년당만이 성공했다.

1918년 12월에 장덕수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등을 국내에 파견해서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종용했다. 1919년 1월에는 조용은 장덕수 등을 일본에 보내서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 800원을 전달하고 2.8독립선언을 도왔다. 신한청년당원인 이광수는 1919년 1월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2.8독립선언문을 초안하였다. 1919년 2월 1일에는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 발표를 만주에서 성사시켰다.

신한청년당은 3.1운동 이후 4월 10~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임시 독립사무실을 설치하여 임정수립을 논의하는 장을 마련했다. 정부 수립 여부, 정부의 형태, 주요 정강 등의 마련에 큰 영향을 끼쳤다. 4월 10일에 열린 첫 임시의정원회의에 참석한 29명 중에 9명이 신한청년당원이었다.

신한청년당은 작은 단체였으나, 3.1운동 전후에 기대하기 어려운 큰 활약을 했다. 당의 강령은 대한독립 사회개량 세계대동의 세 가지였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진해산 명령에 의해서 1922년 12월에 해체되었다.

비단 신한청년당 뿐만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사의 중심에서 민족을 바로 세우는데 깊이 참여했다. 이 전통은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나, 70년대 이후 민주화 인권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교회는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위한 교두보 역할도 감당했고, 남북의 평화적인 교류협력에도 한 몫을 했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동반자가 된데에는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한 회심과 신앙적인 각성이 토대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은 무너져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70년대와 80년대의 폭발적인 교회성장은 이러한 노력을 가상하게 보신 하나님의 선물일 것이다. 기독교가 한국사회 최대의 종교가 된 것도 이를 가상하게 보신 하나님의 은총이리라. 한국교회는 민족사의 진로를 바꾼 공동체답게, 오늘 사회 각 영역에서 맡은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며, 민족의 내일을 위한 과제 앞에 겸허하게 서야한다.



변창배 목사/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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