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유학생들, "적에게 배워 적과 싸웠다"

조선유학생들, "적에게 배워 적과 싸웠다"

[ 2.8독립선언 100주년-도쿄 르포 ] 100년 전 항일 독립운동 정신 이어갈 과제 남아

이수진 기자 sjlee@pckworld.com
2019년 02월 10일(일) 18:58
100년 전 2월 8일 600여 명의 조선 유학생들과 함께 일제의 심장부에서 '조선청년독립선언(2.8독립선언)'을 외친 주역들. 이들 조선청년독립단 11인의 모습은 재일본한국YMCA 2층에 마련된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한 쪽 벽면에 전시돼 있다.
재일본한국YMCA 앞에 세워져 있는 '조선 독립 선언 기념비'.
【 일본 도쿄 = 이수진 기자】 100년 전 1919년 2월 8일, 적국의 심장부에서 독립을 선언한 그날 토요일엔 '30년만의 큰 눈'이 내렸다고 한다. 2.8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재일한국인, 일본인들이 모여 새로운 한일관계의 과제를 모색하며 2.8독립선언의 의의를 고찰하는 시간이 종일 이어진 지난 9일 토요일도 도쿄에는 하루종일 눈비가 오락가락했다. 2월 7일엔 문화공연으로 전야제, 8일 당일에는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으며, 9일에는 오전·오후에 걸쳐 심포지엄을 열며 3일간 100년 전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기렸다.

9일 오전, 일본인들이 모여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모임'에서는 독립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근촌 백관수의 한시들이 소개됐고, 2.8독립선언서 보다143년 전에 나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평가받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2.8독립선언서와 비교·분석하는 발표도 이어졌다.

"정녕 때는 2월이건만 봄 기운 아직도 어이 더딘가 / 세 다다미 크기의 감방 창 아래에서 / 역시 나홀로 모름이련가"라며 독립의 염원을 담은 옥중시를 남긴 근촌 백관수는 당시 일본에 온 유학생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인물이다.

당시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국권을 강점 당한 이유가 '나라에 힘이 없어서'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적지에라도 가서 배우고 익혀 민족에 보탬이 되고 싶어하는 청년들이 늘어갔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사비를 들여 문물을 배우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수는 1912년 485명(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통계), 1915년 581명, 1919년 631명으로 늘어갔으며, 1920년엔 1100명이 넘었다. 관비로 유학온 학생을 포함하면 1919년 조선인 유학생 수는 678명이나 된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보고 듣고 접한 정보와 문물들을 가지고 일본의 심장부에서 독립을 외친 것을 두고, 서정민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는 "적에게 배워 적과 싸운 것"이라고 표현했다.

서 교수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승전국의 속국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배들이 이것을 정말 몰랐겠는가. 그들에게는 그걸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이 있었고, 특수한 원칙을 보편적 가치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문학적, 감성적 천재성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김지섭, 이봉창 등 독립지사들이 수감됐던 이치가야 형무소 터. 이 형무소에서 김지섭은 병사했고, 이봉창은 사형이 집행됐다. 요초마치공원이 된 이 터에는 일본변호사협회가 세운 형사자위령탑이 서 있다. 옛터를 찾은 한국 순례객들.
그는 "독립선언에는 민족의 자부심이 있고, 역사적 회한이 들어있으며, 미래에 대한 각오가 있다. 그리고 일본과의 적대적 관계를 꿈꾼 것이 아니라, 동지적 관계를 꿈꿨다"며, "이러한 움직임은 조소앙 선생의 상해임시정부 헌장까지 이어져 기승전결을 이뤘다"고 말했다. 이어 "군주의 나라에서 '우리(민중)의 나라'로 변하는 데 단 9년이 걸렸다는 것은 서양학자들도 놀라는 대목"이라면서, "인도사람들이 런던에서 한 적 없고, 남미사람들이 스페인에서 한 적 없는 독립운동을 조선 식민지 청년들은 동경 한복판, 적의 심장부에서 했다"며, 2.8독립선언의 중요성과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근대화가 '타율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불평등조약(강화조약)을 하게된 것은 '관세'를 모른 무지에서 비롯됐다"면서, 자기반성적 입장에서 포문을 열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는 1월부터 6월까지 베르사이유궁전에서 6개월 동안 이어졌지만, 400여 가지가 체결된 가운데 조선의 문제는 한 마디도 거론이 안됐다. 2.8독립선언이 파리강화회의에 건 기대는 무산된 셈이다. 이를 두고 "일본의 한 역사학자는 '베르사유조약(파리강화조약)은 베르사유의 배반'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윤 명예교수는 전했다.

당시 조선 청년들의 화두이자 키워드가 '민족'이었음은 '2.8독립선언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선언서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용어는 '민족'으로 45회나 언급된다. 윤 명예교수는 "이것은 공격적 국수주의인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다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민족주의"라고 설명하면서,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민족차별, 조선인 비하, 직업·임금 차별 등을 생활에서 느끼고 부딪히게 되면서, 민족을 향한 마음,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등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100년을 맞는다. 그 옛날 청년들은 민족사적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취재를 마친 저녁, 재일본한국YMCA를 나서 숙소를 향해 1km 남짓 길을 걸어가면서 '독립선언 후 일제의 눈을 피해 흩어진 조선의 유학생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숨소리 조차 감춘 채 어느 후미진 골목 처마 밑으로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리는 눈을 피해 우산을 든 손이 몹시 부끄러워지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2.8독립선언 100주년-도쿄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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