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할머니와 민족의 동반자

김복동 할머니와 민족의 동반자

[ 기고 ]

김종생 목사
2019년 02월 11일(월) 16:11
지난 1월 28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는 나이 열네 살에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나라에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평일에는 15명쯤, 토·일요일에는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한 50명쯤 됐을기라. 씻을 시간도 없이 그렇게 찢기고 패이고, 살점 뜯겨진 채 짐승만도 못한 삶을 견뎌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예순두 살에 '위안부'로서의 삶을 고백했으나 할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 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신고하고 큰언니가 발을 끊었어. 우리 아버지, 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 나를 찾고, 더 쓸쓸해졌어." 국가가, 사회가, 교회가 침묵하고 개인의 소중한 삶이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버리도록 방기한 결과다.

1990년 11월 16일 여성운동 차원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조직하는데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그 산실이 되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김학순 할머니(연동교회)는 최초로 공개증언에 나섰고 이듬해인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정오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여성연합회의 애정과 관심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교회의 관심 밖에 있었다.

2010년 8월 11일 6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제930회 수요시위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증언자로 나선 김복동 할머니(당시 85세)는 "한 번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수많은 어린 소녀들을 끌고 가 일본군이 성 노예로 짓밟았으니 그토록 아픈 역사를 누가 알겠느냐"며 한 많은 세월을 고백했다. 마침 과거의 아픔을 되돌아보고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취지로 준비된 '한국교회 8.15대성회' 관계자들은 이 수요시위에 참석하였고 한국교회 8.15대성회 조직위원회는 "한국교회가 여러분과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약속과 함께 "원통함을 씻는 날이 반드시 올 줄로 믿는다"는 메시지로 할머니들을 위로했다.

2010년 8월 15일 오후 서울광장을 비롯한 전국 81개 도시와 해외 75개 도시에서 기독교인 100만 명이 참석한 대규모 기도성회가 열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이순덕 할머니는 발언자로 나서 "일본 정부가 아직도 잘못을 사죄하지 않고, 공식 배상에도 나서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 일에 함께해 하루 빨리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이 일을 계기로 명성교회는 새성전 입당기념으로 2012년 3월 마포구 연남동에 지상 2층의 단독주택 65평을 매입(17억원 상당)하여 위안부할머니(고 김복동, 고 이순덕, 길원옥)들의 생활터전('평화의 우리집')을 제공하고 8년째인 현재까지 매월 생활비를 지원해 왔다.

30여 년 전 교회 여성들의 기도와 관심으로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다시금 교회의 관심과 참여로 잘 해결되기를 소망해본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 교단의 주제가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이다. 민족의 아픔이었던 위안부 문제는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위로자로, 이 시대의 과제인 민족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동반자 되어 한국사회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한국교회 되기를 염원해 본다.



김종생 목사(빛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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