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22일

12월 17~22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2018년 12월 14일(금) 13:33
월-주님처럼 찾아주자
본문: 막 6:45~52
찬송가: 454장

장양식 목사/기뻐하는교회
본문은 소위 '오병이어'로 불리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주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홀로 남아 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던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호수 중간쯤 건너고 있을 때 돌풍을 만난 것이다.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돌풍 그것도 어두운 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제자들은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문제는 주님까지 그 배에 계시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고 있는데도 돌풍을 만났다는 점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면 주님께서 앞길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주셔서 탄탄대로만 걷게 되고, 꽃길만 걷게 되리라 기대한다. 이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순종의 길이 고난의 길이고, 믿는 사람도 혹독한 시련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놀라운 말씀이 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에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나온다. 앞의 두 개는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보여주는 동사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자들의 응답을 촉구하는 주님의 행동을 보여주는 동사이다.
 
비록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계시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이 직면한 상황을 다 보셨다. 멀리 계셔도 다 보셨고, 배에 함께 계시지 않아도 다 보셨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한 그 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그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보시고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주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찾아오셨다. 제자들이 고생하는 고난의 현장으로 헐레벌떡 달려오신 것이다.
 
제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주님께서 굳이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실 필요가 없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어디서든지 말씀 한 마디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은 우리로 찾아다니는 삶, 제자들처럼 고난의 현장에 있는 이웃들, 특히 함께 지체된 믿음의 가정을 돌아보는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래서 친히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문제의 현장까지 찾아오신 주님, 어려운 지체들의 상황에 눈을 돌리거나 그들의 외침에 귀를 막지 않고 주님처럼 기꺼이 찾아가서 돌아보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양식 목사/기뻐하는교회

화-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삶
본문: 막 1:1~8
찬송가: 280장

류시완 목사/포항창포교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알려준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외쳤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주된 내용은 바로 '회개'였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세례요한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삶으로 '회개'를 선포했을 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했다.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아, 내가 잘못했구나'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까지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당시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개의 열매가 없으면 찍혀 불에 던져지고 만다. 예수님을 믿어도 제대로 된 회개와 열매가 없으면 망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면서 주님 오심을 기다려야 할까? 본문 말씀에서 세례요한을 통해 두 가지 삶을 깨닫게 된다.
 
첫째,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6절 말씀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라 가만히 있어도 모든 삶이 보장되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세상적인 모든 욕심을 버렸다. 청빈의 삶을 살고 나아가 성빈의 삶을 살면서 주님 오심을 기다렸다. 우리가 세상에 화려하고 멋지고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면 주님을 온전히 기다릴 수 없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표는 오직 예수님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청빈의 삶, 성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욕심이 가득 차 있으면 결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다.
 
둘째,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7절에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라고 하면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존귀하신 분으로 증거했다. 성도가 나를 구원하신 분을 전하고,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한 것이며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최고의 삶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참된 평화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나아가 재림 예수님을 사모하는 우리는 회개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세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참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귀한 열매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류시완 목사/포항창포교회

수-평화의 나라가 임하길
본문: 사 11:1~19
찬송가: 104장

변철 목사/삼보교회
우리 사회가 더욱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다. 분노와 허탈만이 남는다. 갈등이 폭발한다. 많은 사람들이 욕하는 동시에 선망하는 이중적인 인간의 욕망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단체가 '토지와 경제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희년함께'라는 단체이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물질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물질에 대한 성경의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 전쟁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인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의미한다. 평화(平和)는 평평할 평(平)과 화목할 화(和)자로 이루어져있다. 평평할 평은 균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목할 화는 벼 화(禾)자와 입 구(口)자로 구성된 글자이다. 수확한 벼(禾)를 여럿이 나누어 먹는다(口)에서 화목하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누가 더 많이 갖거나 덜 갖지 않고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갖는 것이 평화의 출발점이다. 가진 자들의 갑질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된다. 그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고, 평화를 깨트린다. 주님께서 오시는 계절이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것이 그저 꿈에 불과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이 허공을 치는 말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의 주인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온 땅 가운데 그분의 주권이 선포되고, 그분의 다스리심에 모든 믿는 자가 순종하여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이 땅에 화해의 영을 허락하소서. 땅에 안식을 허락하소서. 물질의 노예가 된 심령 가운데 자유와 해방을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변철 목사/삼보교회

목-마음을 새롭게 하자
본문: 눅 3:7~14
찬송가: 412장

이복희 목사/만촌동산교회
원래 대강절(Advent)은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그래서 대강절이라는 교회력을 대림절이라고도 부른다.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준비는 세례 요한에게 당부하셨다. 이는 오늘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기도 하다.
 
첫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했다(눅 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데는 특심이 있었다. 요단 강 인근까지 나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수고도 마지않았다. 그러함에도 그들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고 갖가지 프로그램으로 훈련을 받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동일한 죄를 저지른다. 그 어떤 신앙 행위를 하였더라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진정한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둘째, 타성에 젖은 신앙을 벗어야 한다. 세례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고 했다(눅 3:8). 이스라엘 백성에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놀라운 감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서서히 옅어져 갔다. 처음의 뜨거웠던 감격은 그들이 만든 신앙의 틀 속에서 점차 식어갔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이 형식화되는 순간, 신앙은 타성에 빠져든다. 우리의 신앙 또한 주님의 마음과 멀어져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 아닌 주님을 향한 갈급함, 하나님 나라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회복되어야 한다.
 
셋째,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군중들의 질문에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눅 3:11).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죄를 그치는 수준의 소극적 신앙이 아니라 믿음의 적극적인 실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약 2:17). 우리는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셨듯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섬겨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다가가 우리의 것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열매가 맺히기까진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한 해 동안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교계의 이슈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대림절의 원래 의미는 라틴어로 '오다'라는 뜻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 부끄러움이 없이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잘 준비하자.
 
오늘의 기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신앙의 타성을 벗어 던지고 뜨거운 신앙이 회복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복희 목사/만촌동산교회

금-기다림의 사랑
본문: 렘 48:11
찬송가: 487장

정지욱 목사/부천상록수교회
하나님은 왜 우리들의 기도에 대해서 속히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게 될 때 초조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본문은 기다림을 찌꺼기를 가라앉혀 제거하는 시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포도를 처음 짜면 탁하고 걸쭉한 찌꺼기가 남게 된다. 그냥 놔두면 찌꺼기와 앙금은 가라앉는다.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후에 포도액을 조심스럽게 다른 그릇으로 옮겨 담고 찌꺼기는 버린다. 이러한 과정을 몇번 거치게 되면 포도 액은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숙성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압을 이 포도액에 비유하신다. 모압은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찌꺼기가 남아 있는 포도주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고난과 기다림을 통해서 찌꺼기가 가라앉게 되었고 찌꺼기를 제거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은 더욱 순수하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다. 기다림은 찌꺼기를 가라앉히는 시간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기다림의 시간이 주어질 때가 있다. 그때는 기다리면서 찌꺼기를 가라앉혀야 한다. 그런데 참지 못해서 움직여 버리면 부유물이 다시 뜨게 되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말씀하시게 된다. 기다림은 정화를 위해서 가치 있는 시간이 된다. 기다릴 때와 행동할 때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다려야 할 때 움직인다면 움직여야 할 때 기다린다면 역사를 이루어내기가 어렵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가장 확실한 행동이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려고 했을 때 성령님이 막으심으로 기다렸다. 그러던 중 마침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움직이게 된다. 막히는 것도 인도하심이다. 영적으로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 보호하심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뜻과 방향 생각대로 되지 않음이 은혜요, 섭리이며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축복과 형통만이 인도하심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인도하심이고 문제도 은혜이며 고통도 하나님의 손길임을 아는 것 그리고 확신하며 기다리는 것 아름다운 신앙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알고 확신한다. 그래서 지금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어도 마지막은 승리할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며 소망 중에 인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길이 되는 것이다.
 
막히면 기다리며 기도하자. 길이 열리면 순종의 걸음으로 달려가자. 두 걸음 전진을 위한 한 걸음의 후퇴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자.

오늘의 기도
기다림이 소망을 향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행동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지욱 목사/부천상록수교회

토-다시 만져주시는 은혜
본문: 막 8:22~26
찬송가: 295장

이요한 목사/괴산중부교회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의 이야기에서 주님은 '침을 뱉어' 눈먼 자를 고치신다. 침 뱉음을 당하는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서러운데 왜 예수님은 침을 뱉는 모욕적인 행위로 이 맹인을 치료하셨을까?
 
예수님이 침을 뱉어 치료하시는 장면에는 이중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선 예수님은 침을 뱉는 행위를 통해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꾸짖는 것이다. 동시에 병든 영혼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친히 그 모욕을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익명의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와 손대어 주기를 구한다. 말씀에 등장하는 맹인은 앞을 볼 수 없기에 스스로 나아올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의 상태에 대한 갈급함도 없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모두 그를 데리고 온 익명의 사람들이 대신해준다. 예수님은 그런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어 고쳐주신다. 예수님이 눈에 침을 뱉어 치료하신 것은 그의 영적인 상태를 꾸짖는 행위였다. 다시는 이런 모습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 뒤 맹인의 상태를 보면 한꺼번에 눈이 확 뜨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시야가 열렸다. 먼저 사람들이 보였고, 뒤이어 "나무 같은 것이 보이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처음은 '블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보였다라고 말한 것이고, 뒤이어 '나무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은 '에이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즉 경험적 차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안수해주신다.
 
주님은 천천히 그가 당황하지 않게 점진적으로 그를 치유해 주신다. 그 과정을 통해 맹인은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이 점차 깊어져간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상대에 따라 접근 방식과 치유방식을 달리 하신다. 예수님은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으로 주님의 백성을 대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는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전과는 철저히 구분된 삶을 살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가장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은 25절이다. 이미 맹인은 사물을 보고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그렇게 두신 것이 아니라 다시 만져주시는 분이시다. 허물어지고 넘어진 우리를 주님은 다시 만져주신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또 다시 만져주신다. 더 나아가 우리가 완전히 볼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주신다. 그것이 우리를 구속해주신 주님의 사랑이다. 다시 만져주시는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 나를 만져주시고, 또 만져주셔서 모든 것을 밝히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요한 목사/괴산중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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