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12월 1일

11월 26일~12월 1일

[ 가정예배 ]

2018년 11월 26일(월) 10:07
월-데라와 나
본문: 창 12:1~9
찬송가: 150장

장대영 목사/안강영락교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있는 명령은 몇 개인가? 우리말 번역은 '떠나라'와 '가라'의 두 개 명령처럼 읽히고 있지만, 원문에서 명령어(동사)는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정황을 고려하면 '떠나라'보다는 '가라'로 읽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것이 이 명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거기(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곳)로 가려면 여기(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를 떠나야 하지만, 여기를 떠난다고 해서 다 거기로 '가는'것은 아니다. 여기를 떠난다 하더라도 거기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시하신 곳에 '갔을' 때,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면, 하나님은 굳이 아브라함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으로는 이미 데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떠난 것만으로 약속의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면, 데라는 하나님께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란으로 들어간 데라가 처음 목적지였던 가나안 땅을 향해 다시 길을 가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이제 데라를 포기하고 그 아들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려는 사람은 '어딘가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가려면 떠나야 하지만 떠난 것이 반드시 간 것은 아니다.
 
약속의 성취를 구원이라는 말로, 혹은 복과 순종이라는 주제로 바꿔서 말해도 거기엔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에서 떠나는 것'과 '~를 향해 가는 것 혹은 들어가는 것'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두 개의 축이다. 이 둘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완성된다. 떠나는 것, 즉 구원의 시작도 구원이라 말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날마다 천성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 거기 들어갈 때 이루어진다. 복은 어떤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지켜 행할 때 얻는 것이다. 순종은 가치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좋은 것까지 진멸했을 때, 비로소 "다 행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약속의 성취, 구원의 서정, 복 있는 삶, 순종의 승리에 중간지대는 없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나아가자. 데라가 되지 말고, 아브라함이 되자.
 
오늘의 기도
믿음의 길 끝까지 가겠습니다. 앞서 가시며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대영 목사/안강영락교회

화-여호와께서 주신 양식
본문: 출 16:13~20
찬송가: 393장

여성우 목사/한빛교회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온지 2개월이 지났을 때에야 비로소 신 광야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출애굽 할 당시에 백성들이 가지고 나왔던 양식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백성들은 원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당장에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자와 긍휼로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만나의 축복 이면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첫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는 애굽 왕이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한 양식을 채워주셨다. 더 이상 바로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이 채워주심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로 순종이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만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시험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시면서 지켜야 할 규례를 주셨는데 '먹을 만큼만, 사람 수효대로,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이요 축복이라는 것이다. 특히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내일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모든 염려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다. 그러면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백성들의 탐욕과 불순종의 모습이다.
 
셋째로 만나보다도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만나의 특별한 점은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만 이틀 치의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신기한 것은 다른 날에는 하루가 지나면 썩고 냄새났지만 안식일에는 만나가 상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거두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은 예배드리는 백성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 영적 능력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셔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오늘도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성우 목사/한빛교회

수-준비하는 자의 행복
본문: 마 25:1~13
찬송가: 320장

이양재 목사/명성비전교회
성경에는 혼인잔치가 자주 등장한다. 혼인잔치 분위기는 천국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오늘 본문 열 처녀 비유도 사실은 천국 잔치와 같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열 처녀들의 이야기이다. 등불과 별도로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거절당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첫째, 믿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천국 입성의 최우선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또 다른 혼인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나 슬피 울 것이라 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믿음으로 중심을 분명히 잡지 않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는 시대이다. 문화, 예술, 교육,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더욱 믿음이 필요한 시대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둘째, 맡겨진 일을 지혜롭게 잘 감당해야 한다. 기독교는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신앙이다. 예수님도 현재에 충성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그 때문에 미래의 모든 영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완성시켜 주셨다. 때문에 오늘을 부지런히 성실하고 충성되게 살아가야 한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그런 사람들의 미래는 오히려 밝다. 준비된 자의 행복이 여기에 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또한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셨다. 대신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도 하셨다.
 
셋째,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마지막 날 심판의 자리에서 주님은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나누신다고 하셨다. 열 처녀들 중에도 나누어졌다. 또 다른 심판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기도 하셨다. 그 기준은 세상에서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가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불에 떨어졌다. 부자가 특별히 나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집 앞에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이 적은 자들에게 있어야 하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사랑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일찍이 우리를 주의 자녀로 택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하늘 아버지를 더욱 경외함으로 하늘의 지혜를 얻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양재 목사/명성비전교회

목-에벤에셀의 신앙
본문: 삼상 7:7~12
찬송가: 218장

노재근 목사/감교교회
이스라엘은 이웃 강대국인 블레셋 나라에 늘 전쟁과 압박에 시달려 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이 때 백성은 사무엘에게 요청을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니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다. 드디어 블레셋이 오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패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
 
전쟁이 끝난 후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서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였는데 뜻이 도움의 돌이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우리들 역시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친히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무엘의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번제로 드릴 때에 난지 8일밖에 되지 않는 양으로 어미의 보호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연약한 어린 양이었다. 이렇듯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에서 어린 양 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가 있어야 함을 말해 준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이 백성과 전쟁을 맡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번제는 자신을 온전히 드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한다. 이에 블레셋 군사들이 혼비백산 달아나자 이스라엘이 추격하여 전멸시켰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개입하셨다. 이를 증명하고, 후세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사무엘은 돌을 세워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이다. 이후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다시는 블레셋이 침범치 못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스라엘 위에 있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스라엘이 군사적인 것으로 무장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그 자체가 인정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문제가 생기면, 먼저 해야 할 일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생각하면서 산다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철저하게 지켜주시며, 평안과 기쁨 중에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잠시이나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굳게 믿을 때에 매사에 승리한다. 하나님을 범사에 높여드리자.
 
오늘의 기도
여기까지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따라 매사에 이 고백 신앙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재근 목사/감교교회

금-하나님을 기쁘시게
본문: 히 11:1~6
찬송가: 545장

박복점 목사/안식관 은빛사랑 공동체 원장
2018년의 대강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202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렸지만 그들은 믿음의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가 메시아,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음에도 분봉왕 헤롯은 영의 눈이 멀어 오히려 세례요한의 머리를 취하여 소반에 담아 함께 불의를 저지른 여인의 소원대로 주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면 예루살렘에 의롭고 경건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시므온과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성전을 섬기던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과부 안나라는 선지자 두 사람만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였고 그 믿음으로 아기 예수를 안아보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는 걸까?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걸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선진들의 믿음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아벨은 하나님께 더 나은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사라 자신도 잉태할 수 없음에도 약속하신 이를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웃음으로 반겼다. 이러한 선진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알 같이 후손이 생육하였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자처하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본 것이다.
 
오늘 우리도 아벨과 같은 처지에서 더 나은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이 원하시면 어디든, 서라 하시면 멈춰서야 하는 믿음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권속들과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박해가 있을 때 부끄럽게 생각하며 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리어 고난을 자처하며 함께 핍박과 박해의 현장에서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영적유산을 받은 믿음의 자녀들이다. 선진들은 보지 못했어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다. 오늘날 만민에게 성경말씀을 주었다. 교과서와 같이 훤하게 보여주고 답까지 다 주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주는데도 짐짓 모르는 척 잠시잠깐의 낙으로 행복된 순간들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상으로 주시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평안과 구속의 역사를 선물로 주셨다. 믿음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 자녀의 권세로 본향에 잇대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복점 목사/안식관 은빛사랑 공동체 원장

토-한밤중에 드린 기도와 찬송
본문: 행 16:16~34
찬송가: 487장

최영태 목사/대현교회
인생을 살다 보면 상식을 벗어나 진행되는 일도 많다. 이렇게 상식을 벗어나 어두운 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상식을 벗어난 첫 번째 사건은 귀신이 선교사들을 칭찬해 준 일이다. 빌립보 시의 한 귀신들린 점쟁이가 선교사 바울 일행을 따라와 소리 지르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선교사들을 칭찬한다. 그러나 귀신이 바울을 칭찬한다 해서 오해해선 안된다. 귀신이 아무리 좋은 말, 바른 말을 해도 하나님 편이 아니다. 바울은 귀신이 사람을 칭찬해주는 것 속에 예수님을 높이지 않고 귀신을 높이려고 했던 악한 음모가 있음을 알아차렸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
 
상식을 벗어난 2번째 사건은 귀신을 쫓아내고도 감옥에 갇힌 일이다. 점쟁이 여종은 귀신이 나가자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녀에게 복된 일이다. 그러나 여종의 주인은 돈벌이가 안 되자 선교사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옷을 찢고 매로 쳐서 빌립보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
 
그렇다면 오늘 빌립보감옥에 바울과 실라가 투옥된 것에는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일까? 바울과 실라는 비상식적인 일 속에는 하나님의 뜻, 섭리가 있을거라 믿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인 '한밤중'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영적인'한밤중'을 만났을 때 해야 할 일은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도와 찬양을 드렸다. 그때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자 자다가 놀라 깬 간수가 자결을 시도한다. 겁에 질린 간수에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말한다. 그때 간수는 죄수인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난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선포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믿게 되므로 크게 기뻐하는 일이 생겼다. 이것이 인생의 '한밤중'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이다. 하나님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하는 기쁨을 위하여 사도 바울과 실라에게 '한밤중'을 허락하신 것이다. '한밤중' 없이 형통도 없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고난을 불평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도하고 찬송하자.
 
오늘의 기도
인생의 한밤중에도 기도하고 찬송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영태 목사/대현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