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9)~(10)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 <연중기획>비종교인, 그 절반에 대한 관심 ] 종교 '삶에 대한 궁극적 의미의 체계'

천병석 교수
2017년 12월 27일(수) 08:56

천병석 교수
부산장신대학교

'기독교는 서양 종교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근대사적 맥락에서 보면, 기독교는 당연히 서양 세력이다. 동학에 대립하는 서학이요, 유불선의 전통에 대비되는 외래 종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실상, 서양인들에게도 기독교는 그들 고유의 종교라기보다는 중동 아시아 지역에서 전래된 종교일 뿐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신화로 전락해 버렸지만 유럽에도 과거엔 그들 나름의 신전과 종교가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본래가 낯선 것으로 서양문화에 근거하지도 않았고 그 문화를 정당화하지도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교황이나 수도원이나 신부라는 제도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나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불선이 한국의 고유종교인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선교는 이 땅에 정착된 도교로서, 도교와 유교는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불교는 인도의 종교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오백년씩 불교와 유교가 흥왕했기에 우리 고유 종교로 여겨지지만 정확힌 외래 종교이다. 한국 고유의 종교라고 한다면 아마도 샤머니즘이 제격일 것이다. 선교는 특히 그렇거니와 유교와 불교조차도 샤머니즘에 의해 습합된 형태로 이 땅에 존립하는 종교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은 동서 문명 혹은 문화에 관련하여 종교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궁극적 진리와 구원의 탐구하는데 있어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종교의 의미는 인간적 삶에 대한 해명과 구원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 능력은 인간사에 관련된 것이지만 인간학적 영역에서 유래되지 않는다. 인간과 세계는 스스로를 해명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 동양 전통에서는 피동적 한계에 처해있는 인간과 세계를 자연 자체의 원리(도교)나 문화적 창달(유교)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기독교를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한 신개신교주의에서도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결국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판단을 문화와 마찬가지로 인간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최종 결론은 아닌 셈이다. 전쟁의 참상이라는 시대경험적 계기로 인한 변화로 보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18~19세기에 종교를 문화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 했던 서양의 시도는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종교가 반드시 인간적 삶의 궁극적 해명과 구원을 지향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틸리히(1886~1965)는 한때 문화는 '의미'의 개별형식과의 일치를 지향하고, 종교는 그 '의미의 의미'로서 무한자를 지향한다고 했다. 신율적 질서를 통해 종교와 문화의 의미의 통일을 낙관했던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에는 그런 기대를 접었다. 문화와 종교가 그의 신율적 근원으로부터 이탈하는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중의 시도대로 무한자, 종교 그리고 문화 사이의 소외를 밝히고 해명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신학이나 종교에 궁극적 해결능력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래적 대답은 각종 종교 현상들의 연구를 통해 답변될 수는 없다. 종교 현상들은 외피일 뿐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본래적 실체가 그 안에 있다. 그리로부터 인간적 삶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 주어진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진리, 선, 정의, 구원, 해탈, 자유, 해방으로 표출된다. 인간의 현실이 그 자체로 문제시되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적 삶에 대한 궁극적 해명과 구원의 능력이다. 종교로서의 자격과 제도적 정당성 여부는 부차적이다. 종교 자체는 문제에 대한 해결에 접근해가는 과정이요 노력일 뿐, 해결이 아니다. 종교가 스스로 해결인 것처럼 자처하고 기대하는 데서 종교는 진리에 대한 독선과 왜곡의 위기에 빠진다.

종교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표현은, '삶에 대한 궁극적 의미의 체계'일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미에 속박되어 있다. 누구나 그가 순응하건 저항하건 간에 주어진 시대에 충실히 살고, 주어진 삶의 여건과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산다. 현실적 삶을 영위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유한성과 지식의 편협성을 경험적으로 자각한다. 게다가 현재적 삶에 주어져 있거나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 또한 지엽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궁극적 의미의 차원에서야 비로소 모든 유한하고 편협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엽적인 의미가 총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이 궁극적 의미의 해명은 구조적으로 드러나는 일정한 논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체계적이다. 이러한 종교이해는 지상명제, 즉 영혼불멸과 자유 그리고 신을  의미해명을 위한 궁극근거로 제시한 칸트(1724~1804)에게서 볼 수 있다. 이 궁극적 차원은 증명될 수는 없지만 삶을 수행하기 위한 실천적 근거로 요청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는 윤리적 관점에서 설명되었을 뿐이지만, 그가 설정한 지상명제와 그것의 의미와 기능은 종교를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궁극적 근거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헤겔(1770~1831)은 종교를 역사적 흐름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나름 창조적 계기를 지닌 다양한 종교들이 '정신의 발전과정'에 놓여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에서 시작돼 인도, 페르시아, 이스라엘, 그리이스, 로마를 거쳐 독일 개신교와 서구 유럽의 문화에서 최종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가 동서양의 종교들을 망라하고 있지만, 모든 종교들이 결국 기독교와 서구문화로 수렴된다는 그런 직선 운동의 도식이 통용되기는 어려웠다. 각양 종교들이 발전과정에서 소멸되기도 하지만, 나름 경쟁적 진리치가 있는 고등종교들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종교를 파악하고자 했다. 인식구조나 운동에서가 아니라 그 본질에서 종교를 보고자 한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고등 종교들을 다루고 있는 데, 특히 유신론으로 특징 지워지는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를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구별한다. 이슬람은 미학적 종교로서 윤리적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에 비해 열등하고, 유대교는 우상적 잔재로 인해 기독교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트뢸취(1865~1923)는 처음에 이러한 기독교의 우월성이 '기독교의 절대성'에 근거해 있다고 보았다. 역사 안에서 신적인 삶의 현현을 보여주는 기독교가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그래서 민족문화와 결합되어있거나 철학적 경향을 띤 다른 종교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기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기독교의 다양성과 문화적 제한성을 알게 되었고, 특히 불교와 힌두교의 문화적 초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토(1869~1937)는 그간의 이론적 접근경향과는 달리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는 '거룩한 것'에서 종교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거룩한 것을 뜻하는 '누미노제'는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경험으로서 절대자에 압도되는 인간의 경험을 표현한다. 다른 종교들에서도 '거룩' 체험이 나타나지만 오토에게는 기독교가 타종교보다 윤리적 특성이 잘 드러나기에 우월한 것으로 간주된다. 

서양에서 종교는 기독교를 의미한다. 종교에 대한 18~19세기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계몽주의적 학문경향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당시 서양인들에게 피상적으로 알려졌을 뿐인 동양종교에 대해서 그들은, 계몽이전의 그리스 시대 내지 중세 가톨릭과 유사하다는 인상 아래, 미신적 혹은 덜 윤리적이라는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윤리성을 강조함으로써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관심이 당시의 종교연구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향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서구적 합리성 맥락에서 이해하는 교회 안팎의 다수 지식인들의 종교에 대한 전이해에 속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종교들 사이의 차이점

동서양의 고등 종교들을 망라해 조망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겠지만, 서양적 우월감을 배제한다면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로 구분을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 표에서 보듯 지구상에 8개의 고등 종교가 있다. 대표적인 4곳의 발상지에서 각각 두 종류의 종교가 성립됐다. 지역별로 두 종류의 종교가 경쟁적으로 출현한 셈이다. 쌍을 이루는 종교들 간에 갈등을 겪었고, 상호 보완과 대립이라는 관계적 특징을 띠기도 한다.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차이는 무엇보다 인격신의 존재유무이다. 자연종교는 신을 배제하기보다는 신적 존재에 걸맞는 인격성이 결여돼 있다는 특징이 있다. 힌두교에는 2억 이상의 신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이스 로마의 신들처럼 인도유럽어족의 전통에서 다신교가 본래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신들은 주체적 인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대체로 인간적 한계경험을 반영할 뿐이다. 인간의 삶과 행동에 대한 소통과 구속력이 없다. 동일지역에서 나중에 발생한 불교는 신적 존재라는 전제조차도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대조적인 함축성을 지닌다. 궁극적 의미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종교적 다신론은 무신론에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종교인 도교와 유교는 자연종교의 특성을 그대로 지녔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도는 자연을 법처럼 따른다는 사상은 종교에 대한 자연의 우위를 천명한다. 역(易)은 자연의 운동을 음양으로 파악하여 기호화한 것으로 도교와 유교의 공동근거이다. 도교는 인위를 버리고 자연의 운동에 순응하고자 하지만, 유교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개인과 사회에 기여하는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다. 제도를 장려하는 유교는 물화에 빠질 수 있고, 무위에 역점을 두는 도교는 허무에 빠지기 쉽다. 두 중국종교들은 상호 대조적이면서도 보완적이다. 자연종교는 인간 삶의 현실, 곧 궁극이전적인 문제를 주제화하고, 그것을 진지하고 섬세하게 다루는 특화된 장점이 있다. 

한국선교 초기의 목사요 신학자인 최병헌(1858~1927)은 '성산명경'에서 동양종교와 기독교 신앙과의 대화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서양학자들의 종교연구에서 드러나는 자기반복적 논리의 한계가 사라지고, 기독교와 유불선 사이의 신앙 내용적 대비가 경험적 교차서술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는 것이 그의 연구의 장점이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다종교 사회에 속한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뿐 아니라 종교간 대화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기여할 수 있는 인류사적 과제를 부여받고 있는 셈이다.   

계시종교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생한 유대교에서 비롯한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유일신을 섬긴다. 동일한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이스라엘과 이슬람국가들 사이에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모티브가 국제정치적으로 확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과 그에 대항하여 결집된 이슬람 세력 간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두 세력은 동일하게 신정국가이다. 신은 국가 위에 군림하고 개인에게 명령한다. 개인은 신에게 복종하고 희생을 드린다. 자연종교와는 달리 인격적이기는 하지만, 지배와 복종의 율법적 관계가 유일신교의 주된 특징인 셈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연속성이 있지만 내용상의 차이가 크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유일신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공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반이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정교회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제도의 운용에 있다. 개신교는 교회의 직제를 권력시스템화 하거나 국가권력화하지 않고 개인이 직접 신을 만나고 사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한다. 이른바 루터(1483~1546)의 만인제사장설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종교들 사이의 차이점을 다양하게 서술할 수 있겠지만 차이점이나 공통점이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1886~1968)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위해 행한 일을 증거한다. 이미 받은 구원을 증언하는 것이다. 종교가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로 정죄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기 위한 노력일 경우에만 종교는 용납될 수 있다. 바르트는 인간의 종교가 계시에 대립된다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본회퍼(1906~1945)는 말년에 '종교 없는 기독교'와 '비종교적 성서해석'을 제안했다. 인간적 종교가 그리스도 신앙을 결핍한다면 세계의 비종교화가 오히려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속화된 기독교는 종교폐기론에 빠지거나 세속화에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다른 사상으로 대체될 수 있다. 동양종교의 깊이와 풍요를 알지 못하는 서양적 사유의 결국인 셈이다.

세계 불화를 종교전쟁 탓으로 돌리면서 세계평화를 위해 종교화해를 내세우는 경향이 세계적 대세가 되었다. 명분은 있지만 다양한 종교적 가르침을 평화 이데올로기로 평준화 시킬 위험이 있다. 인간적 삶에는 평화이념으로 희생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 물론 타종교에 대한 자기종교의 우월의식과 독선을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해결책은 동서종교가 상호대화를 통해 서로의 깨우침과 가르침에서 배우고 인간의 삶에 대한 해명과 구원을 적절하게 전달하는 일이다. 이를 테면 인도와 중국의 종교들에는 계시종교가 갖지 못한 궁극이전적 영역에 대한 섬세한 통찰과 실천이 발달되어 있다. 계시차원의 지식은 궁극적 의미내용을 지니고 있다. 본회퍼가 '윤리학'에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적인 것'의 상호가치를 인정하고 다양한 조합을 통해 연결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영역, 특히 동양종교의 깊이와 풍요가 궁극적인 혹은 궁극이전적인 차원에서 숙고될 여지는 없었다. 

유교경전 어디에서나 인간의 심성과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바른 삶의 이치와 수립에 대한 상세한 지침이 주어져 있다. 불교적 수행에는 온갖 탐욕을 가라앉히는 명상과 자기를 잊고 궁극적 진리에 몰입하는 경건과 인내가 있다. '도덕경'에 나타난 깊이를 맞본 사람은 제도적 삶을 버거워하는 인생에 유유자적 초탈적 자유를 제공한다. 유불선에 관한 이런 내용들은 한국인으로서는 일정부분 누구나 문화적으로 체득되어 있다. 기독교가 특히 개신교가 전통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인상이 만연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을 종교적 경쟁관계에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인 스스로 자신의 신앙내용이 종교와 문화에 불과하다고 천명한 셈이다. 
가톨릭은 라너(1904~1984)의 '익명적 그리스도인'에 의거하여 타종교에 대한 포괄적 관점을 취한다. 신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영하고 있지만 가톨릭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평가절하될 소지가 없지 않다. 개신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진정으로 만나야 한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발전적 변화를 꿈꾸며 기꺼이 열린 가슴으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존중하며 배우고자 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궁극적인 차원과 그 이전적 차원이 균형잡힌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구원의 비전을 구체화함으로서 인류사에 기여할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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