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 23~28일

[가정예배]10월 23~2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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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0일(금) 18:59

월-동성연애는 죄
본문 : 레 18:22, 20:13
찬송 : 255장

동성연애(homosexuality)는 죄다. 소돔 고모라의 유황 불이 비오듯 쏟아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죄다. 우리나라의 일부 사람들이 소수보호법을 통과시켜서 동성연애를 합법화하려는 일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악을 공개적으로 두둔하는 일이다. 약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사랑하고 치료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분명 죄악을 버리고 주님께 나아온 자들을 위함이었다. 동성연애가 죄라고 말하는 성경말씀을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강하게 외쳐야 한다.
첫째, 남녀가 결혼해 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말씀에 아담을 돕는 배필로 하와를 창조해 주셨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한 몸을 이루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라 남녀가 결혼하는 일과 생명을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응하는 일이며 인간이 살아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동성연애는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는 일이다.
둘째, 동성연애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신약에서도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다.(고전 6:9-10)
셋째, 동성연애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징벌이 따른다. 이 세상에서와 저 세상에서 징벌이 따른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죄악은 자신만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가 그것을 아담에게 먹인 것과 같이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들임을 잊지 말자.
넷째, 동성애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따뜻이 받아줘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자를 놓아 주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받아주신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생각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사랑으로 받아 주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라 남녀간의 혼인을 통해 건전한 성문화를 정착시키고 우리 자손 만대에 행복한 가정들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류보은 목사
광천교회


화-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본문 : 요 5:2~9
찬송 : 405장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곁에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고, 그곳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각색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여있는데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한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수많은 병자들, 이들은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고통과 슬픔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생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경쟁에서 이겨야만 병을 고치고 자신이 살 수 있다. 천사가 물을 움직이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한다. 이 연못이 베데스다 곧 자비의 집이라 이름한 것은 그래도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 외에 기회를 놓친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상실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스트레스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생들을 향하여 지금도 예수님은 초청장을 보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때 예수님께서 누워 있는 38년된 병자에게 다가가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즉석에서 이 사람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 사람이 치료된 것은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었다.
오늘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행각 다섯은 모세오경을 뜻하며, 38년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광야 38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율법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과 육체는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된 것이다.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인 교회속에 살면서도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문제에 싸여 허덕이며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병자의 모습,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38년된 병자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씀대로 일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좌절하며 지냈던 38년된 병자가 바로 내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말씀속에 계신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란 목사
중리교회


수-말씀으로 새롭게
본문 : 요 1:1~14
찬송 : 199장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때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부르짖었다. 오직 성경이란 주장은 모든 진리의 척도는 오직 성경뿐이며 성경만이 최대 최고 최종의 심판자라는 말이다.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법령 등이 진리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성경만이 절대불변의 진리요 불멸의 영원성을 가졌음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대강령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첫째, 말씀의 영원성이다.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니 말씀도 영원불변함을 밝히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재성(先在性)을 가리킨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과법에 따르나 하나님의 말씀은 원인이 없는 것, 피조된 것이 아님을 뜻하며 창조주임을 가리키는 귀한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계약과 언약은 영원불변하며 믿을 수 있다.
둘째, 말씀은 창조의 주역이다. 말씀이 아니고는 창조가 불가능하다(3절).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과 온 세계를 지으셨다. 태초에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말씀이 오늘날도 계속해서 창조의 역사를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는 곳에는 새로운 역사의 변화가 일어난다.(고후 5:17)

셋째,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14절 말씀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말씀임을 가리킨다. 칼바르트는 말씀을 분류하여 첫째, 살아계신 말씀인 예수그리스도. 둘째, 쓰여진 말씀인 성경. 셋째, 선포된 말씀인 설교. 이 세 가지로 설명한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자는 영원토록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의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다.
넷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죄인인 바울에게 감동을 주어 기록된 성경은 만고의 진리이며 성경 66권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다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모든 이로 하여금 가장 완전한 삶을 살게 하며 은혜로써 구원을 받게 할뿐만 아니라, 인간 만사의 표준이요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생활을 하자.

오늘의 기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읽고, 듣고, 배우고 실천해 복된 길로 가게 하시고 끊임없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승군 목사
덕신제일교회


목-보배를 질그릇에
본문 : 고후 4:7~11
찬송 : 428장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귀한 보배를 보배함에 넣는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것이다. 질그릇은 우리 자신이다. 질그릇은 가치 없고, 부서지기 쉬운 그릇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배를 귀한 보배상자에 넣는데,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을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 우리 속에 넣어 주셨다. 오직 긍휼하심으로 질그릇밖에 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담겨주셨다. 사도바울은 질그릇인 자기 속에 하나님께서 담겨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로서 더 확고한 중심의 자세를 갖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살다보면 내 삶의 처지가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겨쌈을 당한다 할지라도 싸이지 않는다. 내 육체는 싸일 수 있다. 그러나 내 중심은 안 싸인다. 내 상황은 싸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나의 자세는 싸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내 속에 그분이 좌정하고 계시는데 피조물이 지나지 않는 유한한 이 세상 무엇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우겨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는데 낙심하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절망하지 않는가? 내 속에 그분이 계시고, 그분은 어둠에서 나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상황도 나를 힘들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절망하게 할 수는 없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그분이 내 속에 계시는한 누가 덤벼도 나는 그의 먹잇감은 되지 않는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내가 설령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내 전 존재가 파괴되거나 죽지 않는다.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속에 계시기에 설령 나의 육체가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능력, 사랑, 생명, 진리는 결국 주님을 믿는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된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그리스도인으로 앉아 있기까지는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죽어줬기 때문이다. 그분이 죽어서 내 속에서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면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의 은혜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그들이 그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로 인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누군가가 구원받게 하시고, 우리로 인해 이 사회가 밝아질 수 있도록 하시고, 우리로 인해 이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연규용 목사
비홍교회


금-고난의 터널을 기도로 통과하자
본문 : 욘 2:1~9
찬송 : 361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밝힐 등이다. 등이 준비되었는데 어두운 터널을 지나지 못하는 경우는 기름이 없거나 건전지가 준비되지 않아 불을 밝힐 수 없는 경우다.
이처럼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밝힐 등의 역할을 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름이나 건전지의 역할을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이 있어야 한다.
즉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 요나는 자기의 불순종으로 인해 풍랑을 만나고, 풍랑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여호와이레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 여호와이레의 자리는 평탄한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였다. 그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고난의 터널을 헤쳐 나오고 있다.
첫째, 고난 중에 기도의 불을 밝힐 수 있다. 요나가 기도하고 있는 곳은 물고기 뱃속 위자이다. 아마 이곳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꽉 조여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곳이다. 요나는 고난의 상황에서 기도의 불을 밝힌다. 고난 중에 기도의 불을 밝힐 때 그 기도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불빛이 되어 터널을 지날 수 있다.
둘째,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엄청난 불순종의 대가를 치룬다. 요나가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는 바다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물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죽음 직전까지 간다. 그 가운데서 요나는 기도로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있더라도 능히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셋째, 고난 중에 기도할 때 깨닫게 하신다. 요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은 진리가 있다. 하나님 외에 인간이 의지하는 것은 모든 것이 헛되고 거짓되다. 거짓되다는 말의 의미는 알맹이가 없는, 비어 있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요나는 죽음의 문턱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린다. 고난 중에 기도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고, 그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케 하고 헌신된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매달리고 기도하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전능하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기도
고난의 현장에 있다 할지라도 요나처럼 포기하지 않고 기도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경자 목사
제주생명나무학교


토-익숙한 것과 이별하라
본문 : 마 10:16~23
찬송 : 359장

사람은 누구나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환경인 모태를 떠남으로 인생을 시작한 후, 수없이 다양한 떠남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은 누구나 거쳐야 할 성장통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끝없는 비움과 채움, 그리고 떠남과 만남을 통해 성장해간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후 애굽을 떠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애굽은 분명 익숙한 환경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머물러 살았다면 고기와 떡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대세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와 복을 누리지는 못 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편리하고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주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익숙한 것들과 이별의 고통을 통해 더 깊은 하나님의 축복의 장이 열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준비되지 못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한 이유가 무엇일까? 제자들이 편안한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의 믿음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안전지대에서는 부르짖음과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각대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았던 제자들은 거절당함과 고난과 비난이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세상이야 말로 제자들의 믿음이 자라는 훈련장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믿음을 보여주고 능력을 발휘해야 주기를 기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무대는 세상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믿음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만 머무르려고 하고, 교회 안에서만 내 믿음을 자랑하려고 한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성도들에게 교회는 이미 익숙한 곳이다. 믿음이 없어도 머물 수 있고, 자신에게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세상은 믿음 있는 척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영적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 머물지 말고, 믿음으로 새로운 일과 환경에 도전하여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자.

오늘의 기도
쉽고 편안한 환경속에 머물고 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세상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믿음을 주셔서,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기현 목사
방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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