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 2~7일

[가정예배]10월 2~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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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29일(금) 13:43

월-복 있는 사람
본문 : 시 1:1~6, 마 5:1~12
찬송 : 185장

맹장(猛將)이 지장(知將)을 이기지 못하고, 지장(知將)이 덕장(德將)을 이기지 못하고, 덕장(德將)이 복인(福人)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은 용맹스런 장군보다도 꾀많은 사람보다도 그리고 덕스러운 사람보다도 승하는 줄 믿는다. 진정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첫째,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 자가 복있는 사람이다. 복있는 사람은 단순히 출세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인데 먼저 인간관계를 잘 갖는 것을 말한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알고 그런 곳을 피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악한 사람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사람이다. 복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욕심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한다. 시편 1편은 멀리 할 사람들을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팔복에 말씀하시는 복있는 사람은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할 사람들을 말씀해 주신다. 유유상종이다. 악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복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 팔복의 참된 모델은 예수님이다.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고 그를 닮아 변화되는 것이 복이다.

둘째,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복이다. 팔복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다. 시편 1편의 말씀도 세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이 무엇을 즐거워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즐기는가? 말씀되신 예수님을 즐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란다. 말씀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팔복이 모두 이루어진다.

셋째, 이 땅의 복과 하늘의 상급을 받은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영혼이 가난하여 천국에 갈급한 사람, 정말 애통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한 사람, 하나님의 정의를 알고 그 의에 배고프고 목마른 삶을 사는 사람, 약한 이웃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 사악한 세상에서 끝까지 마음의 청결을 지키는 사람,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화해를 조정하고 화평케 하는 사람,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핍박당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하는 것까지 감사로 받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세상의 복의 개념과 하나님의 복은 차이가 있다. 얼마되지 않는 돈을 보고 양심과 믿음을 파는 사람들이나 잠깐의 세상 권력을 얻기 위해 진실과 하나님의 정의를 등지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복은 잠시 잠깐이지만 하나님의 복은 영원하다.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말씀과 주님을 가까이 하면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땅의 기름진 복과 하늘의 참된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류보은 목사
광천교회


화-그리스도인의 자존감
본문 : 스 8:21~23
찬송 : 325장

한 신학자가 초대 교회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1세기의 기록과 문서들을 살피던 중에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를 한 결과 티테디오스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티테디오스라는 수식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고난을 이길 수 있었다.

에스라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배우게 된다.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고,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에스라가 예루살렘의 황폐한 모습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을 했을 때,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에스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협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용기를 얻은 에스라는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사람들을 모았는데, 그들 중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 자손이 한 명도 없었다. 난관에 부딪친 에스라는 왕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겠지만 왕 대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에스라가 왕에게 협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이유가 있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에스라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일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라의 마음을 기쁘시게 받으시고 에스라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라가 보여준 모습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가지고, 세상의 권력과 돈 앞에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 은혜를 주셔서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기현 목사
방초교회


수-다윗의 증조할머니 룻
본문 : 룻 4:18~22
찬송 : 461장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인들이 유무상통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눔의 삶을 산 것이다. 우리말 '통용'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스'는 '공동의'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부정한' 혹은 '더러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코이노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메시지인가! 만약에 누군가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물건을 자기 혼자만 사용하려고 하면 그 물건을 보다 깨끗하게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물건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물건은 쉽게 더러워지기 마련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코이노스'와 관련된 단어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코이노니아를 우리말로 '친교', 혹은 '교제'라고 번역한다. 내가 누군가와 교제하는 코이노니아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과 공동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누군가와 공동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인생에 그 사람의 인생 더러움을 묻혀가는 것을 뜻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룻기의 내용은 대단히 간단하다. 이방 여인 룻이 청상과부가 된 이후에 역시 과부인 유태 여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봉양했고, 젊은 며느리 룻의 효심에 감동한 시어머니 나오미의 주선으로 개가한 룻이 오벳이라는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것은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흔한 이야기는 보기 드문 결론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즉 룻이 개가하여 낳은 아들 오벳의 손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한 다윗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룻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지 않았던들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다윗이 룻의 핏줄을 이어받아 이 땅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한 다윗이 룻의 증손자로 태어난 것은 룻의 삶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젊은 룻이 나이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젊은 자기 인생에 나이든 시어머니 인생의 더러움이 묻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결코 당신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켜서 고고하게 계시지 않으셨다. 보잘 것 없는 인생들과 늘 함께 하셨고, 끝내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더럽히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주님께서 바로 이런 분이시기에 누군가와 교제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더럽히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본받아 누군가와 진정한 교제를 원한다면 자기를 기꺼이 더럽힐 줄 아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연규용 목사
비홍교회


목-찾아오시는 하나님
본문 : 창 28:10~22
찬송 : 338장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비전을 주시며, 그의 삶에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오늘의 말씀은 야곱의 파란만장한 삶의 첫걸음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야곱은 자기가 세운 목표에 무서운 집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기에 어머니 리브가가 동참하여 거짓과 속임수의 방법으로 목표를 이룬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들의 의지와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된다. 그 대가는 부모형제와 생이별이다.

첫째, 하나님은 광야에 찾아오신다. 야곱이 외삼촌이 계신 하란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한 곳에서 돌을 취하여 베개를 삼고 자리에 누웠다. 하나님께서는 적막하고 쓸쓸한 광야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다.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야곱에게 찾아 오셨다. 그것이 그들의 실수이든, 아니며 범죄이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든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 백성들을 만나 주신다. 우리의 삶이 광야의 길을 걷고 있는가?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이다. 광야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광야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비전을 보여주신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주신다. 이 비전이 결국 야곱의 험악한 세월을 승리로 이끌어 준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주신 비전은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둘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셋째, 복을 약속하신다. 넷째, 너와 함께 있어 어디를 가든지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다섯째,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비전을 보아야 한다.

셋째,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면 결단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 그것에 대한 반응을 보인다. 야곱은 잠에서 깨자마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한다. 자기가 누운 곳,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곳,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고백한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약속으로 받고 그것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서원한다. 자신이 다시 돌아오면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결단한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물질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물질의 복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드리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신다. 찾아오셔서 비전을 주시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시며, 그 비전과 약속을 붙잡고 결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신 비전을 붙잡고 결단하는 삶을 통해 그 비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경자 목사
제주생명나무학교


금-어리석은 자여
본문 : 눅 12:15~21
찬송 : 522장 본문의 농부는 도둑질도 간음도 하지 않았고 이웃을 괴롭힌 일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신 것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고 계획이 치밀한 사람이다. 종교심도 강해서 영혼을 감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믿음은 되지 않는다. 그의 인생 설계 속에 주춧돌이 빠져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이다. 왜 이 부자 농부가 어리석은 사람일까?

첫째는 탐심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 15절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했다. 내 곡식, 내 곳간, 내가 쓸 물건, 내 영혼, 태반의 인생들이 '내 재산, 내 통장, 내 생명' 하면서 자기 것에 집착하고 산다. 그러나 진정한 내 것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죽으면 내 모든 것이 일시에 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다만 관리자일 뿐이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내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한데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거기 쌓아두려고 했다. 거기는 바로 동록이 생기고 좀이 나고 도적이 구멍을 뚫는 탐심의 곳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다.

둘째로는 오늘밤 생명을 몰랐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 밤이란 '갑자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동전 한 닢 없이 태어난다. 그리고 빈손으로 간다. 이것이 인생이다. 사업이 잘 될 때 구제하고, 건강할 때 봉사하고, 생명이 있을 때 주님의 일을 하고, 사랑하고 전도해야 한다. '오늘 밤'이 오기 전에 나의 옥합을 깨뜨려야 한다.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건강도 재물도 믿음도 이때를 위함이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생명도 재물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셋째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자기 곳간에 쌓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주인공은 부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의 말씀처럼 세상에서는 부자일지라도 실상은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쌓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치 못한 가난뱅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심령 속에 재물보다 귀한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오늘의 기도
어리석은 부자 같은 삶을 살지 않고 하늘에 재물을 쌓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소서.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승군 목사
덕신제일교회


토-포도주가 떨어진 인생
본문 : 요 2:2~10
찬송 : 428장

한번은 예수님께서 결혼식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셨는데,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여기서 포도주는 무엇을 뜻하는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기쁨, 즐거움, 흥이 깨어졌다. 포도주는 우리 인생의 기쁨, 즐거움을 뜻한다. 즉 오늘 사람들은 포도주가 떨어진 인생처럼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 포도주를 공급해주심으로써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셨다. 여기서 기쁨과 즐거움은 육적인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기쁨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은 기쁨과 즐거움의 동산이었다. '에덴'이라는 뜻이 기쁨이라는 뜻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 에덴동산은 그야말로 기쁨의 동산, 낙원이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이땅의 낙원이었다. 그러나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깨어지고, 삶의 기쁨,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진정한 기쁨은 물질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적 기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야 말로 진정한 기쁨이다.

원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써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 상태가 바로 요한복음 2장에서의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으로 비유된다. 포도주가 떨어진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생, 인생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을 뜻한다. 여기에 인간의 방황과 고뇌가 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구까지 채웠다. 가득 채웠다. 최선을 다하여 순종했다. 그리고 떠서 갖다주라는 말씀에도 무조건 순종했다. 연회장은 믈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칭찬했다. 물로 만든 포도주는 최상의 포도주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에게 참된 기쁨과 만족함을 줄 수 없었다. 왜 잔칫집에 포도주를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했는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다니, 말이 되는가? 하고 나무라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능은 하지만 문제해결을 해주지는 않는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복음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주님께 있다. 참으로 좋으신 이 예수님을 모시고 항상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며, 복음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에 포도주를 공급해주신 주님! 오늘 심령이 메마르고 강팍한 이 시대 속에서 저희에게도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의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란 목사
중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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