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 25~30일

[가정예배]9월 25~3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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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21일(목) 18:20

월-들으라
본문 : 잠 4:10~13
찬송 : 204장

최근 대한민국의 안보와 외교상황은 혼란에 빠져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할 지 방안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마태복음 13장 14~15절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이 완악하여 즉 닫아졌고, 둔해졌고, 무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는가? 리차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3대 방해물은 '시끄러움', '조급함', 그리고 '혼잡함'이다"라고 말했다. 시끄러움, 조급함, 그리고 혼잡함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하다. 잠언 4장 10절에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받는 것이 생명의 해를 길게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 전 "들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들을 들으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같은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7장 13절에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잘 들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1장 26~27절에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르면 저주를 받게 되었다.
복과 저주로 나눠지는 기준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들으라'의 의미는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듣고, 그 들은 것을 마음으로 받아, 그 말씀을 붙잡고 지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지켜 순종하면 우리에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허락하신다.

오늘의 기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켜주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게 하옵소서. 그 말씀을 듣고, 받아 겸손히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성 목사
공음교회


화-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땅
본문 : 수 1:1~2
찬송 : 347장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인생의 열매는 결국 시간의 열매이다.
시간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과거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열매가 가득한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도전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본문은 인생의 새로운 도전 앞에 선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자 여호수아는 두려웠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강팍한가를 몸으로 체험하고 목도했다.
둘째, 가나안 땅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얼마나 강한 군대가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땅은 어떤 땅일까?
첫째로 은혜로 예비된 땅이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 즉,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준다'는 것은 '가진 자가 자기의 것을 갖지 못한 다른 자에게 건내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선물이라는 뜻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선물은 그냥 받으면 되는 것이고 축복은 누리면 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바로 그런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성도들은 두려워하거나 낙심하면 안된다. 비록 그 약속을 둘러싼 상황이 지금 힘들어 보여도 그 앞에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믿음이 필요한 땅이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그냥 내어주시는 은혜라고 본다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 나의 열심이나 공로, 나의 지식이나 소유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배워야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3절에 '밟는 곳'이란 분명히 아직 밟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을 이미 '주었다'고 하신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주신 땅이다.
셋째, 행함으로 누리는 땅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한 가지 명령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준비된 약속을 향한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아름다운 선물, 그 축복들은 우리가 행함으로 믿음의 표현을 할 때 얻어지고 누려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 땅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땅을 믿음으로 밟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은혜로 예비된 거룩한 땅을 누릴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래 목사
덕포교회


수-이제는 값비싼 믿음으로!
본문 : 왕하 18:1~8
찬송 : 459장

오늘 구약 본문 열왕기하 18장 1~8절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 이야기이다.
히스기야는 신앙은 없었으나 왕위를 물려준 아버지 아하스와 믿음의 어머니 아비에게서 태어나 일찍부터 부왕의 정사를 돌봤다. 부왕이 죽고 왕위를 이은 후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정직한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개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선대의 위업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전대에 이룩한 전통 파괴를 의미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성전 안에서 행하던 여러 가지 우상을 제거했다. 하나님과 함께 섬기던 주상, 아세라 목상, 한때는 믿음의 증거였으나 이제는 미신이 되어버린 놋뱀을 헐어 구리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은 히스기야가 치룬 값비싼 대가였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위해 개혁하였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지난 세월, 우리는 믿음을, 값싼 믿음을 너무 많이 말했다. 믿음을 공짜라고 말하는 사이 어느새 믿음이 변질되고 말았다.
값싼 믿음, 싸구려 믿음, 헐값 믿음이 되고 말았다. 값싼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믿음, 그리스도를 따를 때 오는 고난이 없는 믿음,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 없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가 어느 사이 '예수 믿고 축복받으세요'로 변했다. 예수 믿는 거는 공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치명적 오류가 있는 말이다. 믿음은 값을 측정할 수 없도록 귀중한 것이지, 값을 측정할 필요가 없는 싸구려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값싼 믿음에 물들어 지탄을 받고 있고, 싸구려 믿음만을 전하다가 세상의 염려거리로 전락했다. 싸구려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믿음에서 십자가를 지는 믿음으로, 예수에게서 멀어진 믿음에서 예수를 더 까까이 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가 아니고, 이제라도, 지금이라도 싸구려 믿음에서 다시 값비싼 믿음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십자가를 지는 이에게 믿음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고귀한 은혜를 깨닫게 하옵소서. 믿음의 무한한 가치를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믿음의 개혁을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도진 목사
동신교회


목-식탁을 거룩하게
본문 : 레 11:44~47
찬송 : 220장

사람의 생명은 음식에 의존한다. 그런데 음식에 비상이 걸렸다. 어느 것 하나 깨끗한 것을 먹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불결한 음식은 피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먹고자 했는데, 이것이 레위기 11장에 음식법으로 나온다.
음식법은 짐승을 땅에 사는 것과 물에 사는 것과 하늘에 사는 것으로 구분하여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했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지느러미나 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낮에 활동하는 것과 밤에 활동하며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썩은 고기를 먹는 것을 구분하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정결한 것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으로 나누었다. 구분의 기준은 위생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까지도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음식법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대의 랍비와 초대교회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정결한 짐승은 굽이 있어 걷거나 달릴 때 넘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과 환난을 만나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되새김질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고기들이 비늘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느러미로 앞을 향해 나가는 것처럼, 말씀으로 자신을 지키고 세상의 풍조를 거슬러 나아가야 한다. 부정한 새처럼 포악하거나 잔인하면 안 되고, 정결한 새처럼 빛 가운데서 활동하며 살아야 한다.
메리 더글라스(사회인류학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짐승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정결한 유대인과 부정한 이방인과 하나님께 바쳐진 제사장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결한 것을 먹을 때마다 자신들이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임을 기억하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결단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음식을 대해야 할까?
첫째,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은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음식처럼 정결해야 한다. 식탁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음식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며 먹기 때문이다.
둘째, 음식은 우리의 몸을 위한 것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더럽고 부정한 것들은 멀리해야 한다. 오늘날 부정하고 불결한 음식들은 온갖 농약과 화학물질로 오염된 것들, 약품으로 크고 예쁘게 만든 것, 비인간적으로 사육한 동물들, 타인을 착취하여 얻은 음식들이 아닐까?
셋째, 음식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정결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식탁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정결한 음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함께 나눔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롭고 자비로운 성품을 배우고 닮아가는 자리가 식탁의 자리다.

오늘의 기도
깨끗하고 정결한 음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주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배우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영석 목사
갈보리교회


금-십자군이 될까, 십자가를 질까
본문 : 딤전 1:1~17
찬송 : 339장

바울은 자기를 '사도'라 칭한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편 바울은 스스로를 '괴수'라고 깎아내린다. 사도와 괴수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이름이 모두 바울의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 이유를 과거에서 찾는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이 자신을 '비방자'요 '박해자' 또 '폭행자'였다고 폄하할만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배후였다. 바울은 사법살인의 기획자였다. 그럼에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건 지나친 감이 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 사회를 어지럽히는 신흥종교집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은 신성모독의 중죄를 범한 사람들이라 당시 유대인의 법 감정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에 처하는 게 지나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모르고 한 짓이었지만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인정한다.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인 중에 괴수'에게 '사도'의 옷을 입혀주시는 것, 이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은 괴수를 사도 되게 하신다. 바울은 괴수이면서 동시에 사도이다. 다만 사도가 된 바울은 더 이상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 살지 않는다.
비방자였던 바울이 오히려 비방을 받으며, 박해자였던 바울이 이제는 박해를 받으며, 폭행자였던 바울이 생명까지 위협받는 폭행을 겪으며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바울은 여전히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다. 바울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 등 죄인의 유형을 언급하는 끝에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규정한다. 존속살인자, 동성연애자, 인신매매범을 죄인이라 소개하면서, 그 죄인 중에 괴수로 자신을 정조준 한다.
적어도 바울의 교리와 설교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성연애자들보다 무슬림보다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까. 타인의 끔찍한 죄는 내 은밀한 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죄인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오직 은혜'로만 '사도'가 되었음을 우리도 바울처럼 선포하자.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세상에 보내셨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여러 이름으로 세상에 보내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니, 죄인이 의인이 된다.
의인되었다고 해서 십자군 노릇을 해선 안된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향해 분노하시지 않고, 오히려 변호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군이 되어 죄인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처럼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질 만한 따뜻한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준 목사
민들레교회


토-욕심의 죄와 비움의 행복
본문 : 마 5:3, 약 1:15
찬송 : 272장

며칠 전 신문에서 한 여성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 여성은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장애아동 엄마였다. 지역주민들은 집값을 떨어뜨리는 장애인 특수학교가 아닌 집값을 올릴 수 있는 국립한방병원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3년부터 진행되어 오던 특수학교 설립 반대에 기름을 부은 것은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특수학교 예정 부지에 국립한방병원을 세우겠다는 지역구 의원의 공약이   시작이었다. 집값(물질만능주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장애에는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가 있다. 선천적으로 장애로 가지고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부모의 선택도 스스로의 선택도 아닌 무조건 주어진 삶이다. 후천적 장애 역시 오늘의 나와 내 가족이 비장애인이라고 자신만만해하지만, 매일 같이 발생하는 사건사고로 인해 언제라도 장애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족에게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아닐 것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으로, 타자인 장애아동과 그 부모의 마음에 비수를 꽂으며 특수학교를 반대하고 있다. 이는 장애아동에 대한 차별이며 인권침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 차별은 마음을 비우지 못한 욕심이 만들어 낸 죄 된 결과일 뿐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집착하고 연연하지만, 가질수록 부족함은 더 커진다. 그리고 그 커진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죄를 짓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집값을 올리기 위한 욕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의 권리를 박탈하고 무시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욕심을 향한 무한질주는 영적타락이며 곧 죽음이다. 성공만을 질주해 온 이들의 불행한 말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결국 파산, 구속, 죽음(자살) 등으로 그 죄 값을 치뤘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내려놓으라 하신다. 세상의 성공, 명예, 돈 등을 향한 죄 된 욕심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라 하신다. 그리하면 천국을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다. 천국을 선물로 받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 아니라, 마음을 비울 때에 천국은 저절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욕심 하나를 내려놓으면 마음이 가난해지는 행복,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오늘도 비움의 행복을 위해 하나의 욕심을 내려놓는 삶이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 속에 있는 욕심 하나를 내려놓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비움의 행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은숙 목사
모퉁이돌아동복지상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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