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 18~23일

[가정예배]9월 18~23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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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15일(금) 17:23

월-용서받고 용서하고
본문 : 마 18:21~35
찬송 : 274장

가장 쉽게 말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다. 가해자에게는 아름다운 말이나 상처를 입고 지옥의 삶을 살아야 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잔인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라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하고, 또 피해자에게는 강요할 수 없는 말이다.
또 용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사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다. 죄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은 용서해 주어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는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은혜다.
잘못한 자들이 큰소리치며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데 과거를 잊고 용서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억압이다. 진정으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로움이 세워지고, 잘못한 자들은 죄를 고백하고, 피해자들은 충분히 위로받고 눈물이 닦여져야 한다. 용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늘 죄 가운데 살지만,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죄가 관계를 파괴한다면 용서는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 관계를 회복하셨다. 하지만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한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고 이웃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까운 가족 이웃 친구들에게 상처 받는다. 그들의 말 한마디, 얼굴표정, 행동 하나가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계획적으로 상처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처준 것 자체를 모를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상처를 줄 마음이 없었지만 나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늘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늘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살아야 한다.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할 수 있는 한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세 번을 좋아한다.1만 달란트 빚진 종처럼 우리는 셀 수 없는 많은 죄를 지으며 산다. 하나님께서 일일이 기억하고 정죄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무한히 용서받으니 우리도 늘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천국은 용서받고 용서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을 통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기억합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영석 목사
갈보리교회


화-주님을 더 가까이
본문 : 약 4:8~10
찬송 : 435장

가까이함은 접근한다는 의미이다. 목적지에 다가서는 것이다.
목표를 향하여, 조금 더 전진하는 것이다. 다가서야 접근하고, 접근해야 가까이하게 된다.
주님을 가까이하려면 주님께 접근해야 한다. 주님을 가까이함은 주님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접근하는 것이다.
경기를 할 때에는 결승점에 접근해야 우승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공을 잘 차도 골대에 다가서야 공을 넣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이 가까이함이 가시적인 것이든, 비가시적인 것이든, 구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현재적인 것이든, 미래적인 것이든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든 게 족하다. 왜냐하면 모든 은혜는 주님을 가까이 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주님을 가까이 하면 주께서 가까이 해 주신다.
주님을 가까이하는 길은 말씀에 있다. 말씀은 기록된 성경으로, 계시된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설교로 다가온다.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주님에게서 비롯된 말씀이란 의미이다.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말씀, 주님이 주신 말씀, 그리고 주님을 위한 말씀,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말씀하신 이도 주님, 말씀을 보내신 이도 주님이시다.
주님이 말씀의 주체이시며, 말씀의 내용이시고, 말씀의 능력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주님을 가까이 하는 은혜가 임한다. 말씀이 곧 주님이시며 주님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예배 가운데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건 가운데 보여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보아야 한다. 말씀 가운데서 은혜를 발견하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다.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받는다. 그 말씀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주님의 뜻을 깨닫는 자가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하면 이제 낙망이 소망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실망이 촉망으로 바뀌게 된다. 어둠이 빛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아픔이 치유로, 눈물이 기쁨으로,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된다. 주님을 가까이 하라. 더 가까이 하라. 주께서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실 것이다.
너무도 혼돈되고 어지러운 세상, 전쟁과 재난의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가까이 해주시리라! 주님의 약속이다. 이 약속대로 주님을 가까이하면, 더 가까이하면 하늘의 은혜가, 하늘의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더 가까이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도진 목사
동신교회


수-내가 너희를 섬기는 것처럼
본문 : 막 10:42~45
찬송 : 420장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갑질' 논란으로 연일 시끌시끌하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갑질' 하면 떠오르는 굵직한 일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여기서 갑질이란, 갑을관계에서 갑의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점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행하는, 부당행위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 본문말씀에 나타난 섬김, 섬기다는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권력을 이용한 부당행위인 '갑질'의 반대말은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다는 '섬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 그리고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선포를 하신다. 세상의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는 그러지 말고, 크고자 하면 섬기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소위, 을(약자)이 갑(강자)을 섬기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지만 갑(강자)이 을(약자)을 섬기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에 예수는 갑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거꾸로 돌려, 약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는 사회의 갑질을 보며 공분하지만, 우리 속에 숨어있는 일상의 '갑 마인드'는 잘 찾지 못한다. 늘 그러했듯 대접을 받을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늘 그러했듯 상석에 앉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을 때, 늘 그러했듯 결정하면 따라오던 이들로부터 거절을 받았을 때, 심기의 불편함이 꾸역꾸역 올라온다면 내 속의 '갑 마인드'를 돌이켜 봐야 한다. 더 나아가 내가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인데 감히 나에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면 이미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아온 것에 익숙해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당시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죄인(약자)들이었다. 이를 두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난(사회질서 위반)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집에 유숙을 하고 그들을 섬기셨으며 스스로 약자가 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낮은 자로 오신 예수의 섬김을 통해 진정한 권력, 진정한 힘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며 우리 속의 부정적인 갑 마인드를 긍정적인 갑 마인드로 바꿀 수 있는 있는 진정한 힘을 간절히 바래본다.

오늘의 기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섬기러 오셨던 주님을 다시 그려봅니다. 늘 최고가 되기를 바랬으나 먼저 섬기는 것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랬으나 종이 되는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섬김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은숙 목사
모퉁이돌아동복지상담연구소


목-괴물인가, 성전인가
본문 : 행 17:22~25
찬송 : 442장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 예배당을 비롯한 어떤 건물도 성전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거하시는 성전이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성전은 A.D.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다. 그 후로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라는 괴물이 나온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길 가는 나그네를 잡아다가 침대에 눕혀보고는 자신의 침대보다 나그네의 키가 더 크면 다리를 자르고, 나그네의 키가 작으면 억지로 다리를 늘렸다는 괴물이다. 사람이 지은 건물에 하나님께서 계시려면 우리는 이 괴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다리를 뽑고 팔을 자르고 허리를 두 토막 내야 할 지 모른다. 사람이 지은 건물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은 엽기적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성전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가고 머무는 모든 곳이 성전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오시니,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만 한다. 우리는 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땅에 오셨을 때, 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한 이가 있는데, '삭개오'라는 사람이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찾지도 못했고, 하나님에게 가지도 못했고, 그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자기 마을에 오시는 예수님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오셨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을 대면한 삭개오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을 준비한다. 삭개오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준비한 제물은 '가난한 자들'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겐 결핍이 없다. 사람이 소유한 것 중에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의 필요를 채우신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마치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의 결핍과 필요에 관심을 갖는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의 손을 잡아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다. 하나님은 건물 속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 복판 작은 자들과 함께 계신다. 억울한 사람들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억울한 자들,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성전이다.

오늘의 기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우리가 성전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준 목사
민들레교회


금-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본문 : 약 4:1~10
찬송 : 461장

사람들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화평을 방해하는 싸움의 뿌리가 어디에 있을까? 싸우는 정욕에 있다. 원어 성경에는 이 단어를 '다툼을 야기시키는 욕심'이라고 말한다. 싸움은 작은 욕심에서 시작된다.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관용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첫째, 소유에 대한 욕심을 그쳐야 한다. 인간의 싸움은 거의 대부분 소유에서 온다.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죽이는 것은 바로 인간의 멈추지 않은 소유욕 때문이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사람들은 저마다 눈앞에 이익을 더 가지려고 다투며 경쟁하며 살아간다. 건강한 소유욕은 우리로 하여금 열정을 주고 책임을 갖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탐욕은 결국 다툼과 싸움을 일으킨다.
둘째, 쾌락에 대한 욕심을 그쳐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또 하나는 쾌락이다. 쾌락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쾌락이 문제다.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어선 죄악의 쾌락이 문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욕은 성적인 쾌락과 관련되어 있다. 쾌락은 인간의 기본욕구이고 쾌락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할 때 그것은 곧 죄가 되고, 지켜야 할 선을 넘을 때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신다. 다만 쾌락이 자기만족과 자기중심이 될 때부터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교만에 대한 욕심을 그쳐야 한다. 인간의 심층에 있는 욕심, 그 중에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들고, 격렬하게 만드는 것이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무서운 싸움은 자존심 싸움이다. 누가 이기느냐,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싸움이 가장 무서운 싸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잘 믿었지만 누가 높으냐의 문제로 싸웠다. 그래서 성경은 가장 큰 죄는 교만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이 다툼을 야기시키는 욕심을 끊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소유에 대한 욕심이 그치게 하시고, 쾌락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교만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래 목사
덕포교회


토-하늘이 열리고
본문 : 마 3:13~17
찬송 : 183장

가뭄이 들면 논과 밭 그리고 강의 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다. 생명은 흙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그 땅에서 살기 어렵다.
우리의 영혼도 이와 같다. 영적 가뭄에 빠진 영혼은 마음이 갈라져 있고 딱딱하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마음 밭에 뿌려진다하더라도 싹을 틔워 자라기 어렵다. 가뭄 해갈의 근본적인 길은 하늘이 열리고 흡족한 비가 대지 위에 내리는 것 같이, 영적 가뭄의 해결책은 하늘이 열리고 은혜의 단비가 갈급한 영혼 위에 내리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은혜의 단비가 내리는 시작은 '하늘이 열리고'에서부터이다.
첫째로 하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열렸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시며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은혜의 강물에 흠뻑 잠기는 것이며, 또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것'이며,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영혼의 영적 가뭄이 해갈되려면 먼저 하늘이 열려야 한다.
둘째로 하늘이 열리니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 이 말씀에서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면, 우리 가운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임하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임하신다고 해서 당장 세상 염려와 걱정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영혼과 그 자리에 하늘의 평화가 가득하게 된다. 또한 하늘이 열리면 성령의 단비가 내리게 된다. 성령의 단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소생케 된다. 성령의 단비를 통해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며, 생명력을 공급받게 된다.
셋째로 하늘이 열리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하늘로부터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받았다. 고대 성경 시대에 히브리인들에게 '~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그 아들의 정체성을 나타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일을 감당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실제 예수님은 이 말씀 이후 목수의 일을 하지 않으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들을 감당하셨다.

오늘의 기도
하늘 문을 여시고 이 시간 각 영혼들이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 듣게 하시며 주님 주시는 사명 온전히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성 목사
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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