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 11~16일

[가정예배]9월 11~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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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08일(금) 17:32

월-하나님이 현실이다
본문 : 창 14:21~15:1
찬송 : 304장

돈은 밥이 되고 책이 되고 옷이 되고 집이 된다. 돈은 참 놀랍다. 통장 잔고가 많을수록 든든하다. 그럼에도 손대선 안 되는 돈이 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다. 창기가 번 돈도 따뜻한 밥이 되고, 개 같은 자의 소득으로도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지만, 받지 말아야 할 돈이요 쓰지 않아야 할 돈이다. 더러운 돈은 받지도 쓰지도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더러운 돈으로 드리는 예배를 거절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아브람이 소돔왕의 돈을 거절한다. 실 한 올, 끈 한 가닥도 받지 않는다. 소돔 왕의 재산은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축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돈을 거절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상급은 '보상'이다. 더러운 돈을 거절한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이 보상이 되신다. 소돔 왕은 돈으로 보상하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로 보상하신다. 소돔 왕은 돈을 주겠다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주겠다 하신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디모데에게 부탁한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올 때에 겉옷을 가지고…겨울 전에 어서 오라." 감옥에도 겨울이 닥치는데, 바울에겐 겉옷이 없다. 종교 귀족 바리새인이며, 당대 최고 석학 가말리엘의 제자이고,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에게 겉옷이 없다. 바울은 왜, 멀리 있는 디모데에게 도착할지 알 수 없는 편지로 겉옷을 부탁할까? 로마에는 바울에게 겉옷을 영치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지들이 바울을 떠났거나 혹은 버렸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겐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 감옥에 갇힌 바울에겐 돈도 없고, 동지도 없어서, 겨울을 날 겉옷도 없는데, 바울은 감옥에서도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을 남기는 것이 목회라면 바울의 로마 목회는 실패로 보이는데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바울에게 상급이요 보상이기 때문이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겉옷도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겐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돈'이 현실 같다. 그러나 바울은 '돈'을 '똥'이라 한다. 아브람은 소돔 왕의 '돈'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보상금으로 수납한다. 바울과 아브람에겐, 하나님이야 말로 현실이다. 소돔 왕의 도시는 파괴되고 만다. '에덴동산' 같던 소돔성은 지금 흔적도 없다. '돈’이 현실 같지만 그렇지 않다.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가 처한 가장 강력한 현실이다.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만, 돈이 사람을 사랑하진 않는다. 돈을 짝사랑하느니, 하나님의 외사랑을 받는 게 어떨까.

오늘의 기도
오직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며, 욕심과 염려가 아닌 신뢰와 사랑으로 나를 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준 목사
민들레교회


화-내가 먹을거리를 주노라
본문 : 창 1:29~30
찬송 : 274장

먹거리에 대한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화학물질이 범벅된 브라질 닭고기, 덜 익혀진 햄버거 패티, 질소를 담은 용가리 과자, 살충제 뿌린 달걀, E간염을 유발하는 독일 소시지 등은 불만을 넘어 먹거리 공포증까지 불렀다. 특히 살충제 달걀은 온 국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먹거리 공포증을 불러왔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섬긴 결과이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스르며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 스스로 자멸을 선택했던 것이다.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에 대량생산하는 그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브라질의 육가공업체는 유통기한이 넘은 닭고기의 썩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화약약품을 발라 수출했으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순살 닭고기로 둔갑되었다. M사의 분쇄육 햄버거를 먹은 아이는 신장기능 90%를 잃어버렸고, 판매를 올리기 위해 액체질소를 담은 과자는 아이 위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 살충제로 범벅된 달걀과 E감염 바이러스를 품은 소시지는 아이들의 식탁에 올라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우리에게 먹거리로 주셨으며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피조물에게 푸른 풀을 먹거리로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그대로를 적당히 섭취할 때 우리의 식탁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화학약품이 범벅된 사료를 먹인 육류를 유통시키고, 농약으로 포장된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밖에 없는 대량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맘몬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다시 세워야 한다. 한 예로 음식물 수거통이 넘쳐나도록 버려지는 음식물부터 줄여야 한다. 냉장고에 쌓여가는 음식의 양을 줄일 수 있어야 한다. 대량 소비는 대량 생산을 위해 다량의 화학용품과 농약을 투여하고 유전자 조작을 부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와 건강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몸의 보존을 위해서 우리는 먹거리를 선택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때 맘몬의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건강한 먹거리가 풍성할 수 있는 식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만나를 주셨다. 단, 오늘 먹을 만큼만 거두고 내일까지 남겨두지 말라 하셨다. 그러나 욕심을 부린 이들이 남긴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으며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먹거리에 대한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보며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기도해 본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의 욕심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매일의 만나를 먹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먹거리를 감사하며 먹을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은숙 목사
모퉁이돌아동복지상담연구소


수-이것이 믿음의 선택이다
본문 : 삼상 16:10~13
찬송 : 310장

사무엘상 16장은 새로운 왕을 선택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기로 결심하고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베들레헴은 사울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한 곳으로 사무엘도 익숙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아무도 그곳에서 왕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주 한미한 곳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로 새 왕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이새'에게로 가라고 하셨지만 새 왕이 누구인지 지명하지는 않으셨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을 찾아가서 "너희 집 아들 중에 하나님이 선택하실 왕이 있다. 내가 기름을 준비하고 왔노라. 너의 아들들을 나에게 보이라"고 말한다.
이새의 아들들이 얼굴을 보이면서 나온다. 먼저 큰 아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뜻의 이름인 엘리압은 인물이 출중했다. 사무엘도 그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칭송을 듣고 경륜이 높은 선지자 사무엘이 그를 선택했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는 순간 하나님이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사람이 보는 시각과 하나님이 보는 시각은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엘리압은 사무엘의 마음에 들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지 않았다. 이후 이새는 그의 일곱 아들 모두를 하나씩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가 없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묻는다. "내가 본 아들들이 전부냐?" 이새가 부끄러운듯 말한다. "하나 더 있기야 하지만, 아무래도 보여 드릴 정도는 못되서 그냥 양을 돌보게 했습니다." 적어도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눈으로도 사무엘에게 내 놓을 정도의 아들은 아니었다. 아무리 보아도 보잘 것 없는 아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윗을 사무엘이 불러오라고 하고 다윗이 도착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택한 사람이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택법을 알려 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나타난 것보다 안 나타난 것에, 결과보다는 가능성에, 현재보다는 미래에 믿음의 비중을 더 두는 것이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바로 세우고, 주님께 선택 받아 그 선택에 맞는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주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다.
"너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니 내 뜻을 너에게서 다 이루리라."

오늘의 기도
외면과 내면을 다 보시는 하나님, 우리 모두가 외면과 내면, 겉과 속을 잘 가꾸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도진 목사
동신교회


목-시간 관리의 비결
본문 : 엡 5:15~18
찬송 : 455장

누구도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 이 세상에 시간만큼 공정하게 분배된 자원은 없다. 그런데 왜 하루 24시간 똑같은 시간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실패한 인생을, 또한 어떤 사람은 성공한 인생으로 살아가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주로 어떤 일에 시간을 보내는지를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큼 살다가 주님께로 간다. 시간이 곧 생명이다. 돈은 잃었다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지나가면 끝이다. 어떻게 해야 시간 관리를 잘 하며 살 수 있을까?
첫째, 시간을 구속하여 세월을 아껴야 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다. 여기서 세월은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시간이라는 말과 뉘앙스가 좀 다르다. 성경 헬라어에서 말하는 시간은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본문의 세월의 시간은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기회라는 말에 더 가깝다.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아무 의미없이 무덤덤하게 그냥 보내면 안 되고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시간을 구속하는 것이다.
둘째, 주의 뜻을 분별하여 영원한 시간으로 바꾸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주의 뜻을 알고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시간은 죽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우선순위로 우리가 집중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의 뜻을 구하고 살라는 것이다.
셋째, 성령 충만 받아서 주의 뜻을 분별하고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주의 뜻을 분별하고 주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다. 그러면 주의 뜻은 저절로 분별하게 된다. 그리고 주의 뜻대로 살기도 훨씬 더 쉬워진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할 수만 있다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성령충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면 많은 예배를 통해서 말씀충만, 은혜충만을 받아야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말씀에 시간을 더 내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늘 깨어서 주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래 목사
덕포교회


금-주께서 보시고
본문 : 눅 7:11~17
찬송 : 337장

예수님께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과부 여인을 만나주셨다. 이후 예수님을 통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이름 없는 그 여인은 이로 인하여 큰 기쁨을 얻었다. 그 기적과 기쁨은 '주께서 보시고'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다는 것인가?
첫째, 주님께서는 '작은 자의 상황과 마음까지'보셨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을 빠져나오는 장례행렬과 그 가운데 외아들의 어머니인 과부를 보셨다. 여기서 '보시고'는 헬라어로 '이돈'이다. 이돈은 헬라어 '호라오'의 과거분사형이다. 헬라어 호라오의 뜻은 눈으로 보며 그것을 넘어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고, 그 처한 상황과 마음까지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눈 위에 손을 얹고 주의 깊게 살펴보듯이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 즉 주님께서는 '가슴앓이를 하듯이' 또한 '창자가 뒤틀리듯이'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다.
둘째, 주님께서는 보시고 멈추셨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고 말씀한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그 기적의 시작이었다면, 가던 길을 멈추신 것은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가는 기적의 진행이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멈추셨고, 그 장례행렬을 멈추실 때 그 기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신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멈추셨고, 그 멈춤은 놀라운 기적과 하나님께 영광으로 나타났다. 우리 주변에 몸과 마음으로 아파하며 우는 영혼들이 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변의 아파하는 영혼들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잠시 하던 사역을 멈추고 아파하는 영혼들 곁에 머물러 함께하라. 우리가 주님의 시각으로 보고 멈출 때, 사랑의 놀라운 일들은 주께서 우리를 세우신 그 자리에서 시작될 것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보시고 말씀하셨다.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죽은 외아들의 어머니가 어떻게 혼자되었는가와 혼자서 외아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아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이해하며 "울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우는 이들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멈추시고 그리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능력과 권세에 의지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죽었던 자는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고, 이 소문은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눈을 닮아 작은 자의 상황과 마음까지 살펴보며, 주님의 말씀하심과 같이 말하며 위로의 사람과 곁에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으로 서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보시고, 멈추어 일하시며, 꼭 맞는 말씀으로 위로하시며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도 주님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성 목사
공음교회


토-아브라함의 딸
본문 : 눅 13:10~!7
찬송 : 406장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고통당하며 허리가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신 이야기다.
첫째, 여인은 18년 동안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살았다. 유대인들은 인과응보 사상에 따라 질병을 죄의 결과로 여겼다. 하지만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또 질병과 고난은 죄와 상관없이 오기도 하고(요 9, 눅 11), 나아가 하나님은 죄인을 징벌하기 전에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다. 본문의 여인은 악한 영, 귀신에 의해 억눌리고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다. 질병 때문만이겠는가? 여인이라는 것 때문에, 병자라는 것 때문에, 인과응보라는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비난과 저주를 받으며 살았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이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오자 사람들은 이들에게 오랑케에 의해 더럽혀진 여인이라며 '환향녀'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그들의 자식은 '호로 자식'이라며 저주했다. 자신들의 잘못도 아니고, 억울하고 분통한 일인데 죄인이 되어 손가락질 받으며 허리를 굽히고 살아야 했다. 우리 사회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질병 때문에, 장애인, 미혼모, 외국인 노동자 등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다.
둘째, 예수님은 여인의 허리를 펴 주고, 권리를 찾아주었다. 여인은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매달리거나 간청하지 않았다. 삶 자체를 저주받은 것으로 여기며 살기에 감히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여인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고 굽은 허리를 펴 주셨다. 소나 나귀도 굶주리고 목말라하면 풀어 주는데, 하물며 그 긴 세월동안 귀신에게 고통 받은 여인을 풀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며 고쳐주셨다.
더 나아가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름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딸이요 가족임을 확인해 주셨다. 그를 향한 비난과 저주를 막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리를 찾아주시고, 허리를 펴고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살게 해 주셨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셋째,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백성들은 여인의 고통과 아픔을 알기에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고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회당장은 여인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주시고 아브라함의 딸로 삼아주신 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영석 목사
갈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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