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 목양칼럼 ]

손주완 목사
2017년 07월 26일(수) 10:59

나는 지금까지 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오랜 동안 노인(어르신)들과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공동체를 시작했던 30대 초반의 나이에 보았던 죽음은 선명했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계속 보게 된 죽음은 이제 흐릿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어 보았다.

논리와 이성으로만 바라본 죽음은 냉정했다. 나는 종종 강의를 할 때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의학적 죽음은 의사가 죽음의 원인(死因)을 규명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학적 죽음의 선언 이후에도, 인간은 완전히 죽기까지 일정 시간이 걸린다. 약 60조개의 세포가 모두 죽는 생물학적 죽음이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죽음의 형태와 내용은 인간과 동물이 똑같다.

인간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 있다. 즉 사회학적 의미의 죽음이다. 사회학적 의미의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다. 이 세상과의 단절이며, 이 세상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았던 사람들과의 단절이다. 종교적 의미의 죽음은 각 종교마다 정의하고 있다.

우리 공동체에서 살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몇 년 전 돌아가셨다. 그 분은 결혼을 세 번이나 하신 분이다. 젊어서부터 건축현장의 노동자(일명 노가다)로 살았다. 큰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늘그막(늙었을 때)에 돈도 모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만난 여자에게 다 털리고 말았다.

본처의 자식들과 두 번째 부인의 자식들에게 해 준 것도 거의 없었다. 빈털터리가 되어 여관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큰 아들은 그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공동체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분노'가 일어났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세 번째 여자에게 속아서 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 다음은 '허무함'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자괴감이었다. 그리고 신앙적인 동기를 찾게 되었다.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매일 기도를 하면서도 그는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점차 일상을 되찾으며,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동체에서 봉사를 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재활용품을 정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며 흐릿하게 느껴졌던 죽음이 그의 죽음으로 다시 선명해졌다. 그의 시신을 나무에서 내려 바닥에 반듯하게 놓은 후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왜 하필 자살을 선택했을까? 신앙적인 동기부여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그 신앙이 그의 삶의 무거운 짐을 왜 덜어주지 못했을까?

결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 아닌데,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내 머리에 남아있다.
지난 6월초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구십 평생을 넘게 사셨으니, 천수(天壽)를 누린 것이다. 젊어서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우셨다. 서울의 큰 교회 권사로 봉사하신 것이 늘 자랑스러웠다. 성품은 꼿꼿했으나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 가족에 대한 애정은 넘치셨으나 타인에게는 냉정했다. 치매로 인해 가족도 신앙도 다 잊어버렸으나, 품위는 잃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기한을 다 채우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생명의 숨을 몰아 내쉬는 고통 속에서도 괴로움은 없으셨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말에 대한 명제(命題)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명쾌하면서도 복잡하다. 의학적이고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대답은 명쾌하나, 사회학적이고 종교적인 죽음에 대한 답은 복잡하다. 하나님(신)에게 답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손주완 목사/작은예수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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