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 17~22일

[가정예배]7월 17~2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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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7월 12일(수) 17:11

월-은과 금보다 더 소중한 재산
본문 : 행 3:1~10
찬송 : 450장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강림사건으로 사도들이 능력을 받고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사와 표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 3장에 와서 드디어 사도행전 첫 번째 이적이 기록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의 병이 고침 받은 사건이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성전 미문에서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 개 남짓 많은 문들이 있었다. 그 많은 문들 가운데 은과 금으로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문'이다. 이것을 한자로 '미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누런 황금이 줄줄이 매달려 있고, 아주 아름다운 황홀한 은으로 잘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했을 때에 아마도 그는 거기에 있는 은과 금을 보면서 말했을 것이다. 그 문은 동쪽으로 들어와 이방인의 뜰을 지나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수많은 죄인들이 그 문을 통해 들어가 제사를 경험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그 문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운 문 앞에 별로 아름답지 못한 풍경 하나가 있었다. 걷지 못하는 노숙인이 멍석을 깔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소위 지체장애인이었다. 성전 안에서 어떤 제사가 이루어지는지, 어떤 멋있는 일들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경험과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바가 아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평생에 소원이 예루살렘 성전을 한 번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걸인은 늘 성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배자들이 던져주는 돈 몇 푼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들 중에 몸은 교회 안에 앉아 있는데 마음과 생각, 열정과 관심은 엉뚱한 데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그가 바로 성전 미문에 앉은 지체장애인이다.
이 걸인이 지금 구걸하고 있는 것은 은과 금이다. 사실 세상에서의 모든 가치 기준은 은과 금이다. 세상에서의 문제해결 능력은 오직 물질경제 밖에 없다. 세상에서 할 이야기도 은과 금, 경제문제가 전부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 목록 제1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유일하고도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우리의 능력이다. 그분의 이름을 붙들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재산도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택했다.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믿는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은과 금보다 더 소중한 가장 위대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 이름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주철 목사
언양영신교회


화-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본문 : 갈 2:20
찬송 : 144장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 가운데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라는 찬송이 있다. 이 찬송은 너무나 가사가 애절하여서 부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인 찬송이다. 이 찬송시는 우리나라 초기 찬송가 편집위원장 김인식 선생이 만든 것이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찬송시가 초기 찬송가 편집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이 찬송가가 지어진 때는 1905년이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었고 그로 인하여 민족의 비통이 사무치던 때였다. 백성들의 기상은 땅에 떨어지고 전국 방방 곡곡에서 수백 수천의 떼가 몰려 나라가 이미 망한 것이라고 아우성이었고 백성들은 살길이 무엇인지 몰라 미친듯이 비탄에 젖은 처참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때 한국교회가 '한국의 장래 희망은 예수의 종교 밖에는 없다'라고 외치며, 우리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 찬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며, 위로 받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찬송가 가사와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가사와 같이 주님은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성경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사랑"이라고 말씀한다. 어느 누가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나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은 일본의 억압과 핍박에 억눌려 소망조차 가질 수 없는 우리 민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시기까지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렸다. 우리는 이 사랑에 얼마나 감격하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의 사랑이 십자가의 고난에서 나타났다면 고난의 연루로 가슴 메인 이들이 찾을 곳은 그런 사랑이 기초가 된 교회밖에 없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친구로서의 사랑이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라는 가사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다. 예수님은 친구처럼 친근하다. 그래서 친구처럼 마구 부를 수 있는 분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친구로서 불렀기에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이름, 새로운 빛, 새로운 왕, 새로운 나라를 찾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든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삶이 윤택해졌지만 인간성은 타락으로 치닫고 있고 사랑은 메말라가고 있고, 과학과 물질의 힘을 의지함으로 물질만능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져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랑을 느끼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사랑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줄로 알고 그 사랑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소망 안에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성호 목사
광생교회


수-나를 위해 세우신 계획
본문 : 욥 23:10~14
찬송 : 337장

나는 내 앞길을 잘 모른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길이 없다. 무슨 병에 걸릴지, 무슨 사고가 날지 유한한 인생인 나로서는 예측하거나 예감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커튼 속의 인생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것이 곧 욥의 수준 높은 신앙관이다. 그는 수평선의 신앙이 아닌, 수직적 신앙을 가진 자이다. 그는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불투명의 인생을 사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수직적 신앙관을 가진 고급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 준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나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세우신 계획을 반드시 이루어주신다.' 이것이 욥기의 중심 내용이다. 욥이 아무리 혼란에 빠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도해 주신다. 우리는 여기서 욥의 수준 높은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욥은 말씀과 기도를 보물로 여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한다. 다윗은 인생의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환란들을 잘 헤쳐 나갔다. 그래서 곤란 중에서도 너그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인생을 살았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통신 라인을 개설하자. 하나님과의 핫라인을 개설하자. 주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안전하게 인도해주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인생을 살다보면 시험이 없는 사람이 없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의 미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재수가 없어서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요, 운이 없어서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요, 팔자가 사나워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속거나 사기당하는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하시고 단련하시는 과정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그분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나를 고귀한 인격자로 만들어주신다. 연단이 큰 만큼 작품도 커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냉수 한 컵 떠준 것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주신다. 당신이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주시며, 반드시 보상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음의 신실함을 지켜나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안정된 미래를 확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의 신실이 내일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에 대한 최상의 계획을 완벽하게 진행하고 계신다. 그리고 모든 걸음마다 함께 해주신다.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초지일관하게 신실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보상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인생의 시련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병수 목사
성서제일교회


목-시한부 인생
본문 : 눅 12:16~21
찬송 : 484장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쌓을 곳이 없어 걱정 근심하며 곳간을 더 크게 짓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오늘 성경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부자가 시한부 인생인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불필요한 것 때문에 근심하고 또한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너는 시한부 인생이고 내가 오라 하면 내려놓고 가야하는 인생'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데 탐심과 미움이 웬말이며,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 곧 끝나고 멈출텐데 왜 이 땅에서 불안해하며 근심과 염려, 미움과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갈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시한부 인생은 소유가 아닌 생명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찾으시면 우리가 준비한 소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원히 살려고 하니 소유가 중요하고 곳간을 짓는 것이 중요하다. 시한부인생에도 소유가 필요하지만 소유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이다. 생명이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한부인생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느냐가 중요하고, 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내 삶이 관계가 있느냐가 중요하며, 이 생명을 이 땅에서 가치있게 멋있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본문 20절 말씀은 영혼을 도로 찾으시는 하나님과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소유를 준비하는 부자와의 갈등문제를 보여주며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내 삶이 소유에 집착하게 되니 염려와 걱정과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에 집중하게 되면 감사와 이해와 용서가 생겨나게 되고 내 모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둘째, 시한부 인생은 지금이 아닌 나중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 어리석은 부자는 나중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곳간을 짓는 목적은 미래를 위한 창조적 투자가 아닌 19절 말씀처럼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 즉 자신의 재산을 쌓아두고 현재를 즐기기 위한 목적이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투자하라는 말이다. 또한 33절 말씀처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고 돌보는 것이다. 즉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주신 것들을 아름답게 사용하는 청지기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시한부인생임을 자각하며 이 땅속에 남은 시간동안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기도
땅의 것을 위해 살게 마시고 지혜롭게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광재 목사
대조제일교회


금-룻의 효도
본문 : 룻 2:17~23
찬송 : 543장

홀로된 며느리 룻을 밖에 내놓고 하루 종일 집에서 기다려야 했던 나오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피붙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외로운 늙은이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착한 며느리, 모압에서 이제 막 와서 물정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이삭이라도 주워오겠다고 무작정 나간 며느리가 얼마나 걱정이 됐을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명령하셨다.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룻은 나오미가 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지성을 다한 효도를 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효성이 시어머니의 신앙까지 존경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을 믿게 됐다. 젊은 룻의 장래를 염려하며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그녀에게 행복을 찾아갈 것을 강요했을 때 룻은 어떠한 가식이나 일시적 동정이 섞이지 않은 진정한 마음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룻의 이러한 자세는 아름다운 자세였다. 그래서 훗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이름이 오르게 되는 복을 받는다. 우리는 룻의 효성을 통하여 신앙의 행위는 곧 사랑이요,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친절과 부모에의 공경임을 깨닫게 된다.
첫째, 그녀는 자신의 부양 행위를 즐거움으로 했다.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하지 않고 의무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자그마한 성읍,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그날 주운 이삭을 이고 집으로 가야했던 룻의 마음은 지친 몸과는 달리 오히려 기쁨으로 넘쳤다. 이삭 줍던 며느리가 돌아왔을 때 시어머니는 무척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며느리를 맞이했다. 룻의 효성스런 행위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로 하여금 감사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곧 가정의 정감과 사랑을 가져오게 했다.
둘째, 룻의 효성스런 행위는 열렬한 기도를 유발시켰다.
룻이 밭에서 먹고 남은 볶은 곡식을 시어머니께 드리기 위하여 싸 가지고 와서 그 앞에 풀어놓았다. 그때 나오미는 놀람과 기쁨, 그리고 감사의 심정으로 마침내는 하나님께 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룻의 효성이 나오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나 죽은 자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나오미의 이 기원은 진정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룻의 효성은 주위 사람에게도 하나님 안에서 칭찬과 기원을 자아내게 했다. 보아스도 룻에 대하여 칭찬하며 기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날개 아래 보호를 받기 원하여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헌신적이고, 충실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봉사하는 자를 위한 기도만큼 고결하고 효과있는 기도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미덕을 잊지 않으신다.

오늘의 기도
말씀 안에서 어른을 공경하고, 말씀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 믿음의 대를 아름답게 이어가는 복된 가문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경호 목사
대전동안교회


토-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본문 : 막 13:10~15
찬송 : 542장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비유를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선택방법 이다. 어려운 영적 비유나 복잡한 교리라도 간단한 비유로 표현하여 놀랍도록 명쾌하게 전달해주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비유에 대하여 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할 목적으로만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잘못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의 비유의 목적을 잘못 알게 되면 해석도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어떤 것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를 잘 밝히고 있다.
첫째는 천국에 대한 말씀을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유한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상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제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권 안에 있는 천국에 대해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의 일상적인 소재로 천국에 대하여 중요한 진리를 생생하게 가르치시는 표현 방법으로 비유를 선택하셨다.
두 번째로, 진리를 듣기 원하지 않는 자들은 진리를 듣고 고침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이 강팍하여 스스로 의롭다하고 자신의 지혜와 슬기에 만족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나타내고자 함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거하신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가난한 심령으로 진리에 주리고 목말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깨우쳐 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중심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포착할 때에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가난한 심령 의에 주리고 목말라 애통하는 자가 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바라보기를 작정하며 머리 숙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더 하시고 늘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해숙 목사
베데스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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