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6월 26일~7월1일

[가정예배]6월 26일~7월1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7년 06월 24일(토) 09:06

월-특권과 월권
본문:대하 26:1~21
찬송:301장

남왕국 유다의 10번째 왕은 웃시야이다. 그는 남왕국 유다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면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군대를 재편하고 예루살렘의 방비를 강화한 후에 최신무기를 증강시켜 블레셋과 아라비아 등을 물리치고, 대적들로부터 엄청난 조공을 받아냈다.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우물을 파서 농업을 진흥시키고, 신기술을 개발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하지만 웃시야는 별 볼 일 없던 사람이다. 아버지 아마샤 왕 때 유다 백성들이 모반을 일으켜서 아마샤를 쫓아내고, 16살 짜리를 왕으로 세운 것이다. 어찌보면, 웃시야는 자격이 미달되는 왕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형통할 수밖에 없는 은혜가 있었다.
첫째, 경건한 어머니가 소개된다.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가 다스리신다"는 뜻을 가진 이름 여골리아, 예루살렘에 가까이 살던 경건한 어머니! 경건한 어머니는 하나님이 베푸신 최고의 은총이다. 둘째, 정직한 아버지가 소개된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정직했고 웃시야가 그 정직한 모습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정직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소중한 유산이다. 셋째, 훌륭한 스승이 소개된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묵시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훈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훈을 주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은 웃시야 왕이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게 바로 그의 성공비결이다. 웃시야 자신에게는 형통의 조건이 별로 없었다. 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총이요 특권이다. 넷째,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을 찾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잘 되게 해주신 것이다.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라." 그의 나라가 강성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16~21절까지는 웃시야 왕이 형벌받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형단에 분향하려 함이라." 웃시야가 범죄한 까닭은 강성하여 진 다음에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웃시야가 품었던 마음의 교만은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다. 스가랴가 죽은 다음에는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둘째로 내게 주시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잘못된 마음이다. 행복한 사람은 가진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가지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셋째로 특권을 넘어서는 월권이다. 그가 왜 월권했을까? 비교의식 때문이다. 비교의식은 비교가난을 가져온다. 내게 주신 은혜를 크게 보자. 교만하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오늘의 기도
내게 주신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여민 목사/송천교호


화- 우리가 광야 길을 걸어 갈 때
본문 : 신 8:1~3
찬송 : 376장

성경에는 여러 광야를 만날 수 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광야로 들어갔으나 거기서 사흘 길을 걷도록 물을 얻지 못한 수르광야(출 15:2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광야에 이를 때 먹을 것을 얻지 못해 배고픈 신 광야(출 16:1), 시내 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호렙 산 근처에 있는 르비딤 광야 역시 물이 없었다(출17:1). 이처럼 시내광야에서 바란 광야 등 여기에 나타나는 광야 이야기는 우리 인생의 부족함을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첫째, 우리에게 광야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광야는 즐길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다. 아무것도 없음의 자리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오히려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를 듣는 곳이다. 낮에는 불볕더위가 내려쬐이고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추위가 스며든다. 주변에 불뱀과 전갈이 있어 생명에도 위협의 요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임하는 소리를 듣기위해 귀를 기울이게 되는 장소이다. 이는 곧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광야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하나님은 왜 광야 가운데 몰아넣었을까?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머문 곳이 후에 벧엘이라고 불리어지는 광야였다(창 28:11). 모든 것이 단절된 광야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광야(거친 들)로 데리고 갔다(호 2:14). 거기서 말로 위로하고 회복을 원했듯(호 2:16) 광야는 회복의 자리이다.
셋째, 광야생활의 핵심은 훈련이다.
세상의 소음과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복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볼 수 있는 곳이 광야이기에 그곳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 삶이 회복되고 영성을 깊게 하는 훈련장소임을 의미한다. 본문 신명기 8장 2절에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광야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낮추게 하시며, 하나님을 인식하는 훈련의 장소이다. 오늘의 광야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삼는 소중한 가치를 배우는 것이 광야의 이야기이다.

오늘의 기도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메마르고 위험하고 두려운 곳,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나가야 하는 길, 시험 많은 인생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형곤 목사/거제제일교회


수-은총으로 깨닫는 계시
본문 :마: 16: 13~20
찬송가:  288장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신다. 당시 주님은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전파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백성들을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을 하셨는데, 그는 전도의 길에 제자들을 파송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도록 분부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각자가 최종적으로 대답해야 할 결정적이며 직접적인 개인의 답변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각 개인의 궁극적인 선택을 해야 할 입장에 처했다. 왜냐하면 예수님 활동 당시에 그의 반대자들은 시기와 두려움으로 악의에 찬 모습을 보이며 대적했기에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제자들은 끝까지 스승을 따라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많은 무리들처럼 떠나야 하는지 결단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그의 많은 제자들이 가버렸을 때 예수님은 "너희도 떠나려 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눈은 열려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백성들이 오래도록 고대하던 참된 메시아였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기뻐하고 칭찬하셨다. 이 같은 고백은 인간 본래의 본성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으로서만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자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즉, 하나님의 은총만이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보여줌으로서 이것을 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고백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의 인성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신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베드로의 고백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이유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로서 구원 사역의 본질이 이 땅에서 유대 민족만의 구원이 아닌 전우주적이며 영원한 구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 또한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에 복음전파의 장본인이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장차 일어날 교회의 수많은 일꾼들에게 교회를 치리할 권리를 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오늘도 우리에게 던져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답할 수 없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신앙이나 지식을 자랑하기위해 조작하거나 꾸며낼 필요없이 오직 나의 중심으로 답해야 한다. 그럴 때에 중심을 보시는 이가 들으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심남숙목사/일양교회


목-구원의 은혜
본문: 유다서 1장 20~21절
찬송가: 491장

충주시는 분지로 이루어져있는데 남한강이 흐르고 충주댐을 중심으로 강이 도심주변으로 흐르고 있다. 물은 남한강을 이루고 있는데 북한강과 만나서 서울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한강이 된다. 많은 물의 시작은 산골짜기에서부터 아주 작은 물이모여서 시냇가를 흐르고 시냇물이 모여서 강을 이룬다. 처음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은 너무나 맑고 깨끗해 보아며 일급수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 있다. 이 물이 강이 되어 흐르면 처음에 맑았던 물은 물의 흐름을 통해서 맑음의 모습은 사라지고 깊이가 보이지 않고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큰 강이 되면 될수록 깊이는 볼 수 없게 되며 물의 흐름의 속도는 빠르게 된다. 결국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이어진다.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면 소금물이 되고 거대한 대양을 이루게 된다. 바다에 모이게 되면 처음 물의 근원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물 흐름의 결국은 바다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바다로 들어갈수록 깊이는 보이지 않고 바다에서 서식하는 수많은 물고기와 생물들이 살아간다. 이것이 공평한 자연의 섭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익명의 기독교인 모습은 사라지고 가볍게 드러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능력이라고 한다. 자신의 지식과 명예와 능력을 자랑하고 나타내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마치 깊은 바다처럼 알 수 없으나 많은 생물에게 삶의 자리를 제공하고 있듯이 자신의 것을 드러내지 아니하는 겸손함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가 되면 홀로 산으로 가시고 자신의 제자들과도 떨어지셨다. 혼자 산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묵상하시며 기도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관심은 천국의 복음이었다. 우리 기독교인의 관심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혜를 통해서 천국까지 이르는 삶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천국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의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4차산업사회를 살아가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천국의 은혜를 늘 고백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즉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지 자신의 신앙고백이 바른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고 있는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로서의 믿음이 무엇이며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주시는 본질적 은혜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보이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으나 그래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목적은 천국이 되어야 한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향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주여 우리에게 드러남이 없는 겸손한 믿음을 허락하사 예수님을 잘 믿고 천국의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덕식목사/갈보리교회


금-만사형통의 복
성경: 창세기 39 : 21~23
찬송가:302장

형통한 삶은 우리가 얼마나 가졌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누리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성공하고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실패하고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성공을 하든 실패하든 만사형통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요셉의 삶이 만사가 형통한 삶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파란만장한 삶이 만사가 형통한 삶이 되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한 것이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다.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모든 일에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세상은 재물이 많고 지식과 권력과 힘이 있는 자를 크게 여기고, 또한 그것들을 많이 소유한 자를 더 크게 여기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는 자를 귀히 여기시고 믿음 있는 자에게 크고 귀한 일을 맡겨 주시며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신다.
믿음이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의 힘이 함께 하시므로 크고 놀랍고 귀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건하지 못하며 범죄하여 죄악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형통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산다.
우리가 만사형통하기 위해서는 요셉처럼 믿음으로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여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충성심을 다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만사형통했다. 요셉은 겸손한 사람 이였기에 만사형통했다.
자기 피알시대이다. 그래서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며 허풍치기를 좋아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대우받기를 좋아한다. 내면적인 모습은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보고 사람을 대하고 판단하다보니 실수가 많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가 큰 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까지도 주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내 이름을 높이 드러내고 크게 되고자 하기보다 겸손히 남을 섬기는 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여 주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만사형통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어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말씀만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만사형통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경옥목사/신실한교회


토-세상 속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본문:창 6:5~8
찬송가:300장

믿음의 기초는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인정하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의식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은혜'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다양한 의미 중 주로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사랑 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창세기 6장 8절의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라고 표현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는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설명되어지는 말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유무에 따라 '의'와 '불의'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그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라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맺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관계를 통하여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며 살아갈 수 있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은혜를 덧입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나타나는 증거가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 범죄할 무렵에 피할 길을 주셔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고, 혹시 죄를 지었을 때에는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기도 하며, 심지어 육신적인 고통이나 가정과 사업상 곤란한 일을 당하게 하실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가 죄를 짓지 못하게 보호하시는데, 이것이 은혜이다.
또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경험했던 것은 참된 예배자의 삶이었다. 의무감이 아닌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드린 예배를 통해 세상을 이기고 버티어 낼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으며 그렇게 하늘의 능력으로 세상과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노아가 예배자였다는 증거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했다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당하는 어려움과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 버텨낸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부요함, 건강, 자녀들의 형통함을 은혜 받은 자의 삶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즐기며, 거짓과 불법과 폭력을 서슴지 않고 범죄하며 살아갈 때 은혜 받은 믿음의 사람들은 노아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며 정직하게 의롭게 살아가므로 조롱과 핍박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죄를 이기며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버티고 이겨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성도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배하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모든 고난을 견디므로 넉넉히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철봉목사/성주제일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