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6월 19~24일

[가정예배] 6월 19~24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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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15일(목) 16:21

월-한 알의 밀알
본문 : 요 12:24
찬송 : 436장

베트남의 첫인상은 사람들의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자신도 키가 작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바쁘게 부지런한 움직임이 우리나라 60~70년대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도 작은 키에 속하였는데 이제는 서구화된 음식 문화와 사회적 발전과 선진국을 향한 국가의 정책들에 의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본문에서 작은 한 알의 밀을 비유로 들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가르치시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측정해볼 수 있는 단위는 한 마리의 양과 겨자씨 그리고 한 알의 밀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작은 것, 하나로부터 시작하는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이루어진 것, 큰 것, 위대한 것, 성공했다고 하는 것 등이 우리의 것이 되고 말았다. 가시적인 것에 집착하는 현상들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밀알의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땅속에서 나타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결과로 싹이 나고 자라나 꽃이 피고 기대해도 좋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처음의 시작을 기억해야 하며 작은 것을 생각해 보고 한 개로 시작하는 단위를 기억해 할 것이다.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서 열매를 맺는 사실을 말씀에서 묵상해보기를 원한다.
첫째, 한 알의 밀은 최소의 단위이다. 예수님께서 100개의 밀알, 수백 마리의 어린양, 수천만 명의 영혼 그리고 위대한 것을 찾으셨다면 어찌 되었을까? 성경은 한 알의 밀을 계시하고 있다. 한 영혼의 구원, 한 영혼을 만남,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을 찾고 계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한 개의 밀알이 예수님께서 찾고 계시는 최소의 단위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밀알의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다. 생명의 현상은 눈에 쉽게 나타나지 아니한다.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의 눈에 쉽게 나타나지 아니한다. 자신의 몸인 배아를 썩혀야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까지 맺어진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땅속에 심기는 순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구원을 위한 영생의 열매를 위해서 계속해서 자라간다. 성도의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자람에 있으며 구원에 있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셋째, 생명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열매이다. 열매는 생명의 자람의 결과인데 밀알의 증식은 반드시 열매로만 가능하게 된다. 즉 한 알의 밀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성도의 생활은 성령의 열매를 생활에서 맺어져야 한다. 성도의 가장 귀한 가치는 생명에 있는 것이요,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며 이 생명은 영생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한사람, 한사람이 가장 귀한 한 알의 밀이며 생명의 열매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임을 고백하여야 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삶에서 귀한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영생에 이르도록 믿음으로 생활하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덕식 목사
갈보리교회


화-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본문 : 욥 42:1~6
찬송 : 453장

본문에서 욥은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에는 의로운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통치에 문제가 있다고 논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은 후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의 소치를 철저히 인정하며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며 돌이켜 주의 은혜를 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러한 실수투성이 어리석은 모습일 수밖에 없다. 내 이름으로 나아가다 넘어지고, 내 힘으로 싸우려다 실패하게 되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때문에 매일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덧입혀 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도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첫째로, 연약함을 고백하여야 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리이까…" 여기서 이치란 '충고, 조언, 계획'을 의미한다. 즉, 욥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못한 채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충고를 가리고 있었음을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슬픔과 비하를 나타내기 위하여 먼지와 재를 뒤집어 쓰는 관습이 있었는데 결국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함은 완전한 회개의 표시로 진실로 뉘우치며 애통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우리는 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회개하는 자세로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뢰어야 한다.
둘째로,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욥은 하나님의 계획과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으며, "주여 듣겠사오니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더욱더 깨닫기 위한 겸손한 요청이었다. 우리는 주의 말씀 듣는 일에 힘써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에 은혜 받고 믿음이 자라며 삶의 지혜가 열려 변화된 삶으로 성화되고 성숙해져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 듣는 것 이외에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간증을 듣는 일 등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의 섭리를 깨닫는 자 되어야 한다.
셋째로, 영적체험이 있어야 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고백은 듣는 단계에서 보는 단계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하여 새삼 깨닫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온 인격으로 경험하며 인식하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힘쓰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주의 증인들로 살게 된 것도 불같은 성령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며, 사도 바울이 이전에 가치있다고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된 것 또한 예수님을 직접 만난 다메섹 체험 때문이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을 통해 주의 이치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심남숙 목사
일양교회


수-위기는 기회
본문 : 창 28:10~22
찬송 : 338장

사람들은 위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다. 성경은 위기가 기회라고 말한다. 위기는 위험하지만 기회이다.
오늘 본문말씀을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은 후에, 형의 보복이 두려워 황급히 고향을 떠나 외가가 있는 밧단아람 땅으로 도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20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도피생활이 시작되는 장면이다. 하란 도피생활은 진정 고달프고 괴로운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지치고 허기진 몸으로 벧엘 벌판에 누워 잠들게 된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한 언약을 재차 말씀하여 주신다. 언제나 동행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심으로 야곱에게 무한한 은총과 위로를 베푸신다. 이에 야곱은 깨어 일어나 확신에 찬 믿음과 뜨거운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드린다. 야곱에게는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다. 위기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잃지 않으면 위기가 기회가 된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는 위기가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지치게 하고 외롭게 홀로 두실 때가 있다. 그리고 절망과 낙심 중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한다. 믿었던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도 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야곱처럼 홀로 남겨두시기도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위기가 있다. 그러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주님만 믿고 나아가면 기회가 된다.
 주님만 믿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야말로 승리하는 삶의 주인공이다.
둘째, 위기는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이다. 평생을 자기 머리와 자기 꾀로 살아온 야곱이다. 가진 것이 많다고, 좋은 환경을 가졌다고, 좋은 머리를 가졌다고,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이 좋지 않고 머리가 나빠도 육체가 약해도 하나님을 더 잘 믿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간절하게 사모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된다.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어야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신령한 축복을 얻는다. 야곱은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말씀으로 약속을 받는다.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자기 생애의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야곱은 불가피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놓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만나 주신다. 드디어 야곱은 새로운 신앙인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새로운 신앙의 삶으로 위기가 기회가 되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 인생에 위기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힘과 용기를 잃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경옥 목사
신실한교회


목-영육의 균형잡힌 영성
본문 : 갈 5:16~23
찬송 : 191장

미국 덴버신학대학교 정성욱 교수는 '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오해 중 첫 번째는 율법주의적 구원관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내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무시한 채,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율법주의의 질곡에 빠져 있다. 이들은 도덕적 선행에 의지하거나 종교적 실천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의인으로 드러내려는 공로주의에 빠져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등의 종교적 행위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심각한 오해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최근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만큼 부정적인 현상이 한국교회의 젊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이 있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에 참석하는 등의 의무적인 종교 행위에 염증을 느끼는 젊은 세대들이 연약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돕고 구제하는 등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복음적 진리라고 생각하고 기존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십일조를 굳이 교회에 드리지 않아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개인적으로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근본 취지에 부합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의 공적 예배와 십일조 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이들을 신(新)율법주의적 구원관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교회 안에 영육의 균형 잡힌 영성이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떡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으라는 말씀이며, 마 6:33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일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능력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힘과 능력이다. 즉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때 영육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령의 열매가 곧 선행이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선행은 구원의 사건 뒤에 따라오는 구원의 목적이자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 모두가 철저하게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비성경적이고 편협한 믿음의 세계를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으로 영육의 균형잡힌 영성으로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철봉 목사
성주제일교회


금-소박한 에노스의 신앙으로
본문 : 창 4:16~26
찬송 : 488장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살게 된 곳이 에덴 동쪽에 있는 놋 땅이다. 놋은 '쉼이 없다'는 뜻이다.
안식이 없는 땅이니, 거기서 어떻게 평안히 살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 여기가 맨 처음 도시문명의 요람이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은 그곳에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고 직업을 개발하고 기술을 발명하고 예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문화 문명의 발달이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시는 건설했지만 평화는 없고, 노래와 춤이 있어도 진정한 기쁨은 없으며, 편리한 삶을 위해 기계를 만들었지만 삶의 만족이 없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가인 후예들의 삶이었다.
가인의 후예들이 왜 도시문명을 구축했을까? 안전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일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그 후로 가인의 후예들이 가장 갈망한 것이 바로 안전이다. 그러나 좋은 집에서 산다고 안전한가? 견고한 성에 산다고 편안한가? 안전 그 다음에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하지만 편리함이 곧 행복이요 만족함은 아니다. 만족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욕망은 한계를 모르는 데 불행이 있다. 때로는 불편하게 사는 지혜도 필요하다. 안전하고 편리한 삶, 그다음엔 보람을 찾는다. 즉 인생의 의미를 추구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인간이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시달리는 생존을 위한 노동, 의미와 보람을 잃어버린 수고, 바로 거기에 인생의 고달픔이 있다.
셋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가인의 후예들에 비해 화려한 문명생활은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하는 공동체였다. 셋이라는 이름은 '기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셋은 새로운 역사의 기초였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이들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가?
"그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다. 소박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았다. 창세기를 읽을 때, 두 개의 가치관, 신앙이 항상 충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가인의 후손 중 대표적 인물인 '라멕의 신앙'과 다른 하나는 셋의 아들인 '에노스의 신앙'이다. 이 두 신앙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어, 이 둘이 만나면 충돌이 불가피한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을 기록한 것이 창세기의 구조이다.
오늘도 세상에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인생은 망하지 않는다.

오늘의 기도
인생을 살면서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먼저 부르며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여민 목사
송천교회


토-변화된 사건
본문 : 요 2:1~11
찬송 : 289장

변질과 변화는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이다. 변질은 성질이 달리 변하는 것이라면 변화는 사물이나 성질이 고쳐져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쌀이 썩은 것은 변질이며, 쌀이 과자가 된 것은 변화이다.
삭개오가 변화돼 감동을 주는 반면 가롯 유다는 변질돼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 속에 신앙생활이 늘 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고통스럽게 한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변하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생활에 변화가 와야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두 가지 변화가 오는데 첫째는, 일시적인 변화이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세상에 속했던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거듭나고 중생되어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신분이 바뀌어 진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더라도 국회의원이 되면 신분이 바뀌어지듯이 예수님을 믿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온다. 둘째는, 이렇게 변화가 오게 되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가 와야 한다. 이것을 연속적인 변화라고 한다.
본문의 요점은 무엇인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변화된 사건이다. 잔칫집에 풍류소리, 노랫소리, 춤추는 소리, 웃음소리가 나야 할 텐데 이상하게 잔칫집이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잔치 집에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 지방의 문화는 술이 포도주였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 웃을 일이 없고 춤출 일이 없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활은 포도주가 떨어진 생활이다. 진정한 기쁨이 없다. 집은 좋아졌는데, 먹을거리는 많아졌는데 기쁨이 없다.
본문은 변화의 사건을 설명한다. 거기 빈 항아리 6개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에 물은 무엇을 뜻하는가? 말씀을 뜻한다. 빈 항아리가 포도주가 가득 차 있을 때 사람에게 환영을 받지만 빈 항아리가 마당 복판에 있을 때에는 들어오는 사람에게 거치게 되고 나가는 사람에게 방해만 되는 것이다. 빈 항아리 6개, 포도주가 떨어진 항아리는 가볍다. 잘 흔들거린다. 또 빈항아리는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세상소리, 인간소리가 난다. 빈 항아리는 잘 깨어진다.
우리 인생은 질그릇이며 깨어지기 쉽다. 이제 주님께서 빈 항아리마다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셨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니까 색깔이 변하고, 맛(질)이 변하고 분위기(웃음)가 변했다. 말씀을 채움은 곧 변화의 기쁨을 맛보게 됨을 의미한다.

오늘의 기도
생명 되시는 하나님! 변화와 감동이 없는 이 시대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질적 변화와 감동이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형곤 목사
거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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