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6월 12~17일

[가정예배]6월 12~1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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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09일(금) 17:44

월-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본문 : 살전 2:7~8
찬송 : 199장

사랑은 우리 인간 삶에 있어서 변함없는 영원한 것이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사랑은 최고의 주제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은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의 생활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생활이 거짓됨 없이 진실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자연히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삶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거기에는 아첨이나 속임수나 탐욕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온전한 사랑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아첨'이나 '속임수'나 '탐욕'이다. 아첨이나 속임수이나 탐욕으로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또한 권위나 의무감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봄날 햇볕처럼 따뜻해야 한다. 그리고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으로, 목숨까지 바칠 생각으로 해야 한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인간이 아첨이나 속임수나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이 찾아왔고 생명이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자연히 죽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서로 상대가 잘못해서 괴로움을 당한다고 원망하고 다투며 살아간다. 이렇게 잘못된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사랑의 손길을 펼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인간에게 화해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시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셔서 인도해주신다. 바울 사도는 이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 세상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어디를 가든지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사도라고 하는 권위나, 먼저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없이,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사랑을 가지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복음을 전하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다. 그만큼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을 복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쓴 것이다. 복음 전하는 것이 다른 의도가 없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복음을 전해 어떤 이득이나 편리를 보고자 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래야 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아들처럼 내 부모님처럼 섬기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경옥 목사
신실한교회


화-하나님의 품으로
본문 : 호 6:1~3
찬송 : 369장

류시화 작가의 '퀘렌시아'의 내용이다. 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이다.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따로 있다. 소는 투우사와 혈전을 벌이다가 쓰러질 만큼 지쳤을 때 바로 이 구역, 피난처 퀘렌시아로 달려간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힘껏 에너지를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이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을 모을 수 있고 쉼을 가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회복의 장소이자 퀘렌시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체를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땅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동식물을 먹어야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적인 능력이 생기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삶에 찌들리고 지쳐있는 사람들, 육체적으로 중병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병원을 찾고 그때부터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으로 찾아가서 몸에 좋다고 하는 음식과 양약을 먹고 회복하는 데 힘쓰는 것을 본다. 하지만 사람들이 영적으로 지쳐 영혼의 휴식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마음이 무너질 때, 그때가 바로 영적인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야 회복이 있고 영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7~68절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 말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인생은 영육간에 온전한 회복이 가능하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반역하며 그분의 품을 떠나 죄악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셔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품으로 돌아갈 때 회복과 치유와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이 치유받고 회복되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그분 앞에 서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을 계획하시고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과 고단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쉼을 허락하시고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와 회복의 은총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믿는다.

오늘의 기도
삶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한 뒤에 다시 눈을 들어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므로 삶의 소망을 허락하시고 영적으로 회복되어지는 은총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철봉 목사
성주제일교회


수-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본문 : 롬 12:1~2
찬송 : 176장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설 때만이 거룩한 성도로 남겨질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바 된 구별된 자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렇다면 혼탁한 이 시대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첫째, 거룩이라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성경 원문에서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기본 의미들은 '구별하다', '분리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여지는 것,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온전해지는 것이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이라는 삶을 위해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에 우리의 삶이 민감하게 반응되어야 한다.
둘째,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성품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기도 하다(레 19:2, 벧전 1:15-16).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요구하신다(레 20:26). 그것은 스스로 거룩하신 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 구별하였다고 하셨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제물처럼 우리 삶도 흠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도 구별하여 흠이 없어야 하며 우리의 몸과 생각과 행동에도 구별된 거룩한 삶이 요구된다.
셋째, 거룩한 삶이란 희생을 통해 가능하다. 레위기에는 백성들을 위해 일반적인 제사 규정으로서 5대 제사법, 즉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를 설명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죄 있는 인간이 제사의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를 회복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거룩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마련해주신 은혜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에 우리는 속죄의 희생양이 되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 기도, 헌금, 봉사 등 삶의 모든 부분이 거룩한 산 제물로서 드려질 때 이 모습이 영적예배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 되시는 하나님, 죄악으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 자신의 모습이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형곤 목사
거제제일교회


목-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
본문 : 창 39:1~5
찬송 : 401장

어머니는 18세에 파평 윤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결혼은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판단이었다. 황당하게 결정된 선택을 받아들이고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인생은 선택이 중요하다. 하지만 항상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의 인생을 생각해보자. 요셉도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낸 사람이 아니다. 무기력하게 선택당하고,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야 했으며, 원하지 않았던 무수한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자리에 나오고 싶어서 나온 사람이 누가 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다. 인간은 피투된 존재, 그러므로 누구나 던져진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본문 1절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요셉이 이끌려…"  요셉은 형제들에게 강제로 이끌려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팔렸다. 보디발 집의 노예로 팔렸다. 그다음에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끌려들어갔다. 이처럼 요셉의 일생은 끌려 다니는 삶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비록 끌려다니는 인생도 귀하게 여기시고 복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끌려다니는 요셉을 복덩이로 세우셨다. 보디발장군의 집이 복을 받았고,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야곱의 가문이 복을 받았고, 애굽 전체가 복을 받았다. 끌려다니던 한 사람 요셉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졌다. 요셉의 일생과 신앙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주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항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붙들고, 또한 요셉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서 그토록 모진 역경을 다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으로 이상한 부분이 있다. 분명히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노예가 아니다. 거기서도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고 죄수의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요셉은 죄수가 아니다. 감옥의 모든 일을 그가 처리한다.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주인공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셉이 당한 불행은 결코 불행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나중에 요셉이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이 그의 삶의 마이너스 요인을 플러스 조건으로 바꿔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더하기'이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더하심이 있는 복된 삶이었다.

오늘의 기도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내 인생, 언제나 소중한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여민 목사
송천교회


금-섬김의 관계
본문 : 요 13:3~8
찬송 : 220장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와, 혹은 그 무언가와 관계 안에서 살아가야하는 존재이한다. 흙으로 창조된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또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아무리 강건하며 지혜있다 하여도 타인의 도움없이 혼자서 문화적인 삶을 영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하루 한 시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자연(대물관계)과 이웃(대인관계)과 하나님(대신관계)과 관계하며 살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여야 성숙한 성도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다.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며 너희가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실때에는 청지기 사명이 함께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리기 위해서는 성실히 가꾸어야할 책임이 따른다. 푸르름이 짙어가는 6월의 농촌에는 밭고랑들이 아름답다. 고추, 콩, 가지 오이 등 각종 채소들이 농부들의 소망어린 보살핌을 먹고 자라가고 있는데, 이제는 환경을 생각하여 친환경 용법으로 농사하는 이들이 더 많다. 이처럼 자연을 벗 삼아 일하며 기도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맑은 생각과 육체의 강건함까지 더하여 주심을 믿는다.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둘째,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저녁 먹는 중에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 섬기는 일이란 쉽지 않다. 타인의 입장을 생각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노 부부가 아내의 생일에 외식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젓가락을 들어 닭고기의 날개부분을 아내의 밥공기에 얹어주었다. 그런데 아내는 "이제까지 30년 넘게 함께 살아오면서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닭다리는 주지 않는군요"하면서 화를 내었고, 그때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날개부분을 양보하여 당신에게 준 것인데"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은 채 앞서 행동한 것이요, 결과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빚어낸 안타까운 일이었다.
셋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며 믿고 의지하여야 한다. 그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섬길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하시기까지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 또한 십자가로 죄 씻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섬김을 미리보게 하신 사건이다. 매일의 삶속에서 성도는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여 감사로 예배의 삶을 살아야한다.

오늘의 기도
자연을 보호하며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섬김의 삶입한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심남숙 목사
일양교회


토-구원의 길
본문 : 요 14:1~6
찬송 : 545장

터키 동부에 하산 케이브라는 고대 수메르 문명의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의 역사는 약 BC 1300년이며 실크로드가 세 방향으로 뻗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이 길을 통해서 인도 남부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안드레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러시아까지 갔다. 다대오는 이란으로, 마태는 에티오피아로, 시몬과 맛디아는 조지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와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후에 선택되어 12사도에 포함된 맛디아까지 복음을 위하여 길을 걸어갔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위하여 사명을 가지고 순교의 길을 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의 길을 만들어 내면서 수고와 고통과 아픔 그리고 십자가의 길인 순교의 길을 갔다.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셨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삶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을 가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준비하고 계획하며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길을 간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앞을 향해 가려고 목표를 설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즉 인간은 보다 나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그 길이 삶을 위하여 수고하는 길, 아픔과 고통의 길, 괴로움과 걱정의 길, 그러면서 행복의 길, 사랑의 길, 생존의 길, 사명의 길을 간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인생은 죽음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길 앞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누리는 생명의 길이 가장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생명의 길을 허락하시며 진리의 길을 가시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누구든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자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며 완전한 구원자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며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얻고 믿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가는 구원과 은혜의 길을 성경이 계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그것은 생명과 구원이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위해 순교의 길을 가며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길을 아름답게 지나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본받아 아름다운 구원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을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덕식 목사
갈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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