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5월 29일~6월 3일

[가정예배]5월 29일~6월 3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7년 05월 26일(금) 18:57

월-네 하나님께 돌아오라
본문 : 호 14:1~3
찬송 : 532장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로서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의 북이스라엘은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적으로, 특별히 영적으로는 대단히 타락한 시기였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노력이 없었으며 자기 위안과 편안만을 추구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점에 호세아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먼저, 호세아는 타락한 이스라엘 사회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신 이후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이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그 이전의 자신의 생각과 욕심대로 살던 야곱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맞추어 살겠다라는 결단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전의 야곱의 삶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경제적인 부는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결국 거기서도 도망쳐야 했다. 형 에서에게 죽을까 겁을 내고 두려워해야 했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잃을까 불안해했다. 온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참 행복을 주셨다. 형 에서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위해 살게 되었다.
두 번째로 호세아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 합리적인가? 경제적인가? 편리한가? 보기에 좋은가?가 우리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합당한가?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가 우리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하고 삶의 방향과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의 삶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것이다. 세상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나를 비우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 성령님을 채우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 삶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호세아의 외침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살아 외치는 소리이다. 모두 그 말씀 앞에 겸손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구원의 감격이 바로 거기에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규성 목사
서광주교회


화-"그러니까 목사님이지!"
본문 : 요 20:1~8
찬송 : 220장

가끔 놓치는 말씀들이 있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모두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하면서도 좀 익숙한 내용이 나오면 습관적으로 그 익숙한 내용에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어떤가? 부활절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소식을 전했다. 두 사도는 놀라 예수님 무덤으로 갈 때 요한이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도착했다. 들은 대로 무덤 문이 열려 있고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세마포가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은 사람이 있다. 요한은 빠르고 베드로는 느리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석력이 좋은 사람이 있다. 다 빨리 달린다면 빨리 달리는 사람은 없다. 다 똑같다면 얼마나 지루한 세상일까? 하나님은 참 솜씨도 좋으시다. 어쩌면 이렇게 다양하게 만드실 생각을 하셨을까? 다양한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는 교회, 나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는 그래서 아름답다.
배려하고 세워주고
먼저 도착한 요한은 왜 먼저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을까? 빈 무덤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빈 무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매사에 남보다 먼저가 목표다. 성적에 승진에 성공에 출세에.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베드로의 위상은 예루살렘교회를 이끈 초대교회의 대표자였다. 인간적으로 요한에게 베드로는 형님 격이요, 교회로는 모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사도들 중에 부활의 첫 목격자로 베드로를 세워주는 요한이다. 베드로를 배려하고 세워주는 요한이다. 얼마나 멋진 사도인가?
지난 5월 둘째 주일, 같은 지역의 두 교회가 연합체육대회를 했다. 첫 대회였지만 잘 준비된 진행에 두 교회 교인들이 함께 둘러앉아 먹는 점심은 말 그대로 잔치였다. 마지막 경기인 계주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의 남녀 대표들이 선수였다. 그런데 갑자기 담임목사들이 최종주자로 달리도록 하자고 했다. 졸지에 불려나간 목사들은, 누가 먼저 달리든 마지막 골인할 때는 기다렸다가 손잡고 같이 들어오자고 했다. 실제로 두 목사는 손을 잡고 들어왔고 그래서 두 교회는 공동우승을 했다. 체육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한 집사님이 매사에 적극적이고 승부욕이 강한 딸이 공동우승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 같아 마음을 풀어주려고 물었다. "○○아! 우리 목사님이 기다리지 않고 그냥 달리셨으면 우리가 우승하는 건데 아쉽지?" 그러자 초등학교 6학년 딸이 말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지!"

오늘의 기도
주님, 매사에 남들보다 앞서는 것을 목표로 삼는 수준에서 벗어나 배려하고 세워줄 줄 아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무종 목사
성광교회


수-보라, 이 사람이로다
본문 : 요 19:1~9
찬송 : 351장

지난 해 여름, 브라질 리우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모든 선수와 모든 게임이 작품이었다. 특히 박상영 선수는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중얼거리는 그 입술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웃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요즘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교인 숫자는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된다. 뿐만 아니라 안티 기독교가 생겼다. 이 현상을 어찌 해야 할까? 
해결책은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사는,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선을 이루고, 피하려는 악을 피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 오늘 본문에서 길을 찾아보자.
본문에 의하면 지금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고 계신다. 2000여 년 전, 그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빌라도는 중동 지구를 총 관장하는 로마의 대표자인 총독이었다. 이 총독에게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청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빌라도는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실수를 한다. 빌라도는 사실 이 재판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엄청난 잘못을 범한다. 지금 예수님은 모순된 재판 앞에 서 계신다. 그런데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 말씀이 없다. 그러나 그 속에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들어야 할 말씀이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세상에 취해 있고, 권력에 취해 있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라. 이 사람이로다(Behold the man)"이라고 탄식한다. 이 사람을 보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 그 말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된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게 된다. 이래서 무책임하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승리를 만드는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과 군중들의 떠들썩함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며 그 잔을 생각하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부활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침묵하신다. 결국 빌라도는 로마를 등에 업고도 실패자가 된다. 이런 경우가 어디 빌라도뿐이일까? 본문을 깊이 묵상해보면 하나님의 사람만이 아는 승리의 길이 가슴 뜨겁게 느껴질 것이다. 지금 혼자 외롭게 서있으나 예수님은 승리자시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반드시 승리하자.

오늘의 기도
우리의 눈이 세상에 덮혀 주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일은 없는지 늘 경계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호 목사
성린교회


목-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라
본문 : 딤전 1:19
찬송 : 421장

얼마 전 작은 아이가 입대를 했다. 신병훈련 중 뜻밖에도 편지를 두통이나 보내왔다. 손편지 쓰는 일에 은사가 없는 줄 알았는데 깨알 같은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낸 것을 보니 그리움을 달래는 데 편지쓰기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편지 글 중에 까까머리 신병 아들의 양심선언이 들어있었다.
내용인즉, 어느 날 저녁에 영내에서 타종교 행사가 있었는데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받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신앙양심에 찔려 가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걸작이다. 갈 걸 그랬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기드온이란 이름의 아이도 갔다 왔더라는 것.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씀이다. 어떤 이들의 믿음은 마치 부서진 배와 같이 그 믿음을 믿음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부탁이다. 요즈음 '착하다'는 말을 본디 용례와는 다르게 이색적인 곳에서 사용하는 것을 본다. 착한 맛, 착한 가격이 그 예인데, '맛이 착하다'는 것은 화학적인 조미료가 안 들어간 천연의 맛을 의미함이요, 가격이 착하다는 것은 가격에 거품이 들어 있지 않고 정당한 값을 매겼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착한 양심은 어떤 양심을 말할까.
양심에 화학조미료가 안 들어있어야 하고 거품이 없어야 함을 뜻하리라. 곧 순결한 양심이다. 믿음과 순결한 양심이 결합하여 순결한 신앙 양심이 된다. 잠시 살펴보자.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많이 있다. 문학가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던진 질문에 사랑으로 산다고 결론내렸고 철학자들 중에서는 이성이나 지성이 우리의 삶을 이끈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자. 우리의 삶이 삶다운 삶이 되게 하는 신비한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는 것이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마치 태양이 온 세계를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살아내야 할 의미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로 향하게 만드셨습니다!"라고 탄식 중에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하심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함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보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순결한 신앙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듣는 귀이다. 우리의 믿음이 부서진 배와 같은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나침반이다.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우리의 의지를 일깨우고 격려해 주는 영혼의 교사이다. 그러한 삶의 여정을 기꺼이 걸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삶의 보람이라고 하는 아주 가치로운 보물 주머니들을 때때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시는 주의 자녀들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영주 목사
거룩한말씀성서교회


금-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
본문 : 시 128:1~6
찬송 : 335장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어 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휘관이었다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리고 미국 제34대 대통령을 지내며 철저하게 주일성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미국을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한번은 소련의 수상이었던 후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후루시초프에게 주일에 함께 교회에 가자고 했지만 거부하여 혼자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화가 난 후루시초프에게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초청받은 귀한 손님이지만 예배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복을 기록한 내용의 시편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본문은 앞에서부터 이어지는 시편으로 126편에 그 배경이 언급되고 있다. 시편 126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노래한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올 때의 고백으로 가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남편은 전쟁터에서 죽고,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아내는 노예가 되어 끌려갔다. 먹을 것도 없고, 성전은 파괴되어 예배드릴 수 없는 현실일지라도 본문 1-5절에 "복이 있도다"라는 선언을 반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걷는 것이 복의 근원임을 말한 것이다. 유다 민족이 불행해진 이유는 므낫세가 왕이 된 이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행하며 우상을 숭배한 결과이다. 오늘날도 '경제'가 최고가 되어 '재물'이 우상이 되었기에 수고한대로 먹지 못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되고 형통하며 결실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 같이 기쁨이 넘치는 가정으로 세우시기에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5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 지어다"라고 노래했다. 여기의 '시온'은 예루살렘 밖에 있는 해발 765m 높이의 산으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은혜가 있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6절에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는 송영구로 맺음을 한 것은 '이스라엘'을 각자의 우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고백해야 하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걷기로 작정하라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가정의 위기와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번영과 평강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학수 목사
장위중앙교회


토-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본문 : 막 16:1~8
찬송 : 161장

부활은 기독교의 꽃이다. 부활절이 있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다. 부활은 어쩌다가 생긴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일곱 번 가까이 예고된 사건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시고 예고대로 부활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고백하고 전파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일곱 가지 증거이다.
일곱 가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부활은 성경에 예고된 사건이다. 부활의 증인과 증거가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침묵이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경비병들에게 준 뇌물이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없다. 지금까지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역사적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 일곱 가지만 분명하면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얻는 축복은 무엇인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평소에나, 죽음이 임박해 올 때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고 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영적 죽음, 육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도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니셨다. 마가의 다락방에, 갈릴리 호숫가에, 의심 많은 도마에게 역사하셨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내 속에 들어와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내 안에 함께 살아계시게 된 것이다. 
이 귀한 부활신앙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굳건히 가져서 예수의 부활로 인해 주어진 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땅 위에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오진 목사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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