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5월 15~20일

[가정예배]5월 15~2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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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12일(금) 18:07

월-약속이 있는 첫계명
본문 : 엡 6:1~3
찬송 : 579장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나인티 쓰리(Ninety-three)'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고 모든 백성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을 때 어느 부대가 이동하며 숲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군인들은 굶주림에 지친 아주머니가 세 아이를 데리고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긴 상사 한사람이 빵을 던져 주었다. 아이들의 엄마는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세 아들에게 주었고 아이들은 정신없이 먹고 기뻐했다.
그 광경을 본 병사가 물었다. "저 여자는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지요?" 상사는 "그게 아니야! 엄마이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자신은 굶으면서도 자녀들이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해한다. 우리는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모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할 줄 모른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관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에 보답하며 살도록 명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두 돌 판에 십계명을 기록해 주셨다. 두 번째 돌 판의 첫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다. 첫 인간관계인 부모와의 관계를 바로 맺을 때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약속하셨다.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단서를 붙였다. '주 안에서'라는 단어는 바울서신에 164회 사용되었는데, 본래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인용한 것으로 주님과 성도의 '신비적 연합'의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체험적인 믿음의 결과로 사용한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내 기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일어나는 주님의 심정으로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을 첨언한 것이다. '옳으니라'는 '디카이온'이라는 헬라어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니라'는 뜻이다. 바울은 신명기 5장 16절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잘 되는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 행동의 의지를 강조하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말로 권면했지만, 2절에서는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존중하는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헬라어 '티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공경하라'는 말씀으로 권고한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모님께 순종하며 공경하는 섬김으로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학수 목사
장위중앙교회


화-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본문 : 눅 2:8~14
찬송 : 305장

파라과이 빈민촌 카테우라는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이 마을에 환경공학자이자 음악 강사인 파비오 차베스가 방문을 하게 되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지옥 같은 현실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그 곳에 작은 음악학교를 열었다. 매립장에서 나오는 재활용품으로 악기를 만들어 악기를 가르쳤고, 랜드 필하모닉(LandfillHarmoic)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전 세계를 다니면서 활동하고 있다.
파비오 차베스 선생의 삶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늘보좌를 떠나, 쓰레기 매립장과 같은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완벽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깨어짐과 고통의 삶을 선택하신 예수, 한숨과 절망과 통곡의 소리를 웃음소리로 바꾸어주신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렇지 않다. 
로마서 3장 10~12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성탄절에 많이 읽히는 말씀인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상황을 잘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왔다는 것, 출생 방법이 다르다는 것, 구약에 예언 되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는가? 마가복음 2장 17절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슬픔의 문제로 고통 하는 자를 살리려고 오신 것이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아래 문장을 완성해 보세요. (              ) 때에 예수님의 실재를 만났다"는 글을 올렸더니 몇 시간 만에 수십 개의 답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을 때" 등의 답변이었다. 답 글을 종합하면 "나의 끝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의 실재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도 가장 절망적인 환경이었을 때,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다. 그때 만난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 내 삶이 어렵더라도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문제를 풀어주고, 회복시켜주시고, 희망을 주시는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 뿐 인줄 믿고 예수님이 내미는 손을 잡고 구원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오진 목사
정동교회


수-그래도 그래야
본문 : 창 9:20~27
찬송 : 577장

노아홍수 후 노아가 보여준 언행은 당혹스럽다. 홍수심판 예고에 믿음으로 준비했던 거룩한 모습은 간곳 없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장막에 누워있는 노아, 술에서 깨어난 후 아들 함을 저주하는 모습은 너무하다 싶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실까 살펴보자.
첫째, 부모는 부모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둘째 아들 함은 저주받을 만큼 잘못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에게 술을 권한 것도 아니고 언제 벌거벗을까 엿보다가 본 것도 아니다. 우연히 보았고 본 것을 남도 아닌 형제들에게 사실대로만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주 받는다. 왜일까? 부모는 부모 이전에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다. 우리들 부모님이 그렇다. 부모라고 다 존경할만한 분들인가? 아버지의 아버지답지 못한 모습, 어머니의 어머니답지 못한 모습이 왜 없겠는가? 그래도 부모는 부모라고 말씀하신다.
둘째, 부모이기에 공경하라 하신다. 공경은 '무겁게 여긴다'는 뜻이다. 함은 분명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그 사실을 셈과 야벳에게 알렸고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본문에 그 사실을 알았다거나 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부모의 부끄러운 사실을 알지 않으려는 마음, 알아도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공경의 시작이다. 함으로부터 아버지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아버지 옷을 찾아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리는 것이었다. 좋지 않은 소식, 부끄러운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덮은 것이다. 어떻게 덮었는가? 아버지가 벗어놓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덮어드렸다. 아버지의 수치와 추태를 상징하는 옷이지만 그래도 아버지 옷이라는 것이다. 술 냄새나는 아버지 옷도 함부로 여기지 않고 무겁게 여기는 아들들, 그 옷을 드는 것도 조심스러워 어깨에 메는 아들들, 둘이서 옷 하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갈 때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했을까? 어색하고 불편해도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 민낯을 보지 않겠다는 자식, 덮어드리겠다는 자식이다.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자식이다. 꼭 큰 일 위대한 일을 해야만 복 받는 것이 아니라 하신다.
본문의 아버지 노아는 잘한 것 하나 없다. 술 취했을 때는 추태를 보이더니 깨어서는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아들을 저주했다. 모든 부모가 존경받을 위치, 공경 받을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부모, 부모답지 못한 부모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래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야' 네가 잘 되리라."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부모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 받게 하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되 부모님의 부모답지 못한 것조차 덮어드리는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무종 목사
성광교회


목-아빠 아버지
본문 : 갈 4:1~7
찬송 : 419장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첫 번째로 그 중심에 사랑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전적인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며 그 사랑의 관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자녀가 부모를 극진히 섬긴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라갈 수는 없다.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결코 자녀인 우리를 버리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신 것이다. 더군다나 이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때로 우리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투정을 부린다 할지라도 부어주시는 사랑이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결코 그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간섭의 방법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를 무조건 이끌고 가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자녀가 가는 길에 동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지 못할지라도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시며 어디를 가든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며, 철저하게 자녀에게 맞추어져 있는 관계이다. 아버지는 자녀를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마음대로 자녀를 조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인격적인 관계로 대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자유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와 대화하려고 하며 자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강요가 아닌 사랑으로 덧입혀 주신다. 
네 번째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다고 증거한다. 죽음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축복의 관계이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비록 자신은 헐벗고 굶주려도 자녀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모와 아픔을 겪었지만 자녀인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가야한다. 우리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날마다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규성 목사
서광주교회


금-살려야 사는 사람
본문 : 겔 3:17~21
찬송 : 478장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악인도, 의인도 다 잘 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파수꾼이란 일명 보초병이다. 보초병은 주로 밤에 불침번을 서면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파수꾼은 지위가 높은 것이 아니다. 물론 지식이 많거나 인격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맡은 책임이 막중하다. 파수꾼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고 편안하게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언자를 파수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파수꾼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파수꾼과 같은 귀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이 파수꾼에게 주는 세 가지 교훈이 있다.
첫째,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가르치라."(겔 3:17).
파수꾼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파수꾼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듣고, 그리고서는 듣지 못한 자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선교란 모르는 자를 알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과 바른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바른 파수꾼이다.
둘째, 파수꾼은 다른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사람이다. 파수꾼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겔 3:18)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 불한당에게 맞은 사람이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간다면, 바로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 나만 편하고 잘되겠다고 도망한다면 죄이다. 그의 운명을 내가 책임질 것은 아니지만 그를 모른 채 하면 안된다. 파수꾼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혼자서는 잘 살 수가 없다. 파수꾼은 나 혼자만 편하고, 나 혼자만 잘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저를 살리고야 나도 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힘이 나에게는 없지만, 살리고자 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셋째, 파수꾼은 자기책임을 다해야 자기생명을 보존한다.(겔 3:19). 파수꾼은 해야할 책임을 다 하고서야 살 수가 있다. 나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서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면 안된다. 또한, 내가 이 자리에 섰을 때 내가 해야 할 부분이 있다.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이 허전해지고,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해야할 일을 찾아 일하는 그 순간에 나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일하는 그 순간에 나의 믿음이 살아나고 성장하고, 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그 의미를 실현하는 가운데, 내 인생의 아름다움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호 목사
성린교회


토-스승의 은혜
본문 : 갈 6:6
찬송 : 442장

언젠가부터 5월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달이 되었다. 부모님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꽃을 달아드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을 드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자기의 분수대로 선물을 마련하여 드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닭을 서너 마리 키우는 집에서는 스승의 날에 짚으로 엮은 꾸러미에 달걀을 채워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는 일도 있었는데 보통 한 꾸러미에는 달걀 10알을 넣었다. 필자도 스승의 날에 달걀 10알을 가지런히 넣은 꾸러미를 들고 학교에 간 기억이 있다. 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를 만질 때 까실까실 했던 느낌과 하얗고 따스한 달걀을 조심스럽게 다루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녀를 지도해 주시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그 마음을 받는 선생님의 모습이 한 장 그림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5월 15일은 1965년에 제정되어 지금까지 지켜오는 스승의 날이다. 당초에는 병환 중에 계시거나 또는 은퇴한 교사를 위로하려고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님께 고마움을 표하는 날로 지정하여 시행한 것이다. 날을 정해 놓고 고마운 마음을 특별히 헤아려보는 것도 의미롭지만 그 고마움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넉넉하게 할 것이다.
가끔 부모님들로부터 "자녀들이 저희들끼리 다투지 않고 제 몫 감당하면서 잘살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가 있다. 참으로 맞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말씀 뒤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손끝에 느껴지는 것은 어쩐 일인가. 마찬가지로 "제자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잘 살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그런 허전함이 역시나 느껴지는 것은 나의 지나친 민감성이 발동하였기 때문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이는 가르침을 받는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살라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선생 된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제인가는 제자였고 또 많은 이들은 지금 제자이다. 누구에게나 선생님이 계시다. 소중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선생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성경이 일러주시는 대로 해보자. 모든 좋은 것을 선생님과 함께하는 제자가 되어보자.
우리가 만난 선생님들 중에 최고의 선생님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시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우리 온 생애의 갈 길을 지도해주시고 늘 주목하여 교훈하고 계시는 주님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는 주님의 착실한 제자가 되어 보자.

오늘의 기도
우리를 친히 가르쳐 주시고 또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배우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배움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모든 좋은 것을 선생님들과 함께 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영주 목사
거룩한말씀성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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