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2월 20~25일

[가정예배]2월 20~25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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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17일(금) 18:29

월-끝까지 사랑
본문 : 요 13:1~10
찬송 : 218장

성경에서 말씀하는 관계의 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다. 아가페, 에로스, 필레오 등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든지 간에 사람은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오늘 본문 역시 사랑을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면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사랑은 희생적인 섬김이다. 사람들은 매일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이 하나의 관념이나 감정의 유희 혹은 소유의 개념이 아님을 세족식을 통해서 가르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제자들의 더럽혀진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정결케 하시려는 원초적이고도, 궁극적인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예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실현되는,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과 한 솥 밥을 먹으면서 내 밥그릇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경쟁하고 견제하면서 서로에게 눈치 밥을 먹이고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세족식을 통해 깨뜨리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둘째,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택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아셨다. 그러나 끝까지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떡을 나눠주셨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 삼십 냥에 스승을 팔아넘긴다. 가룟 유다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이고 인스턴트적인 사랑의 표본이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지독히 이기적인 사랑 놀음을 했다. 그 결과 제자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고, 자신의 인생마저 파멸로 이끌었다.

예일대학의 로버트 스턴버그 박사는 '사랑의 삼각이론'을 발표했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친밀감 요인, 열정 요인, 그리고 책임감 요인으로 구성된다고 결정지었다. 사랑은 친밀감에서 열정의 단계로 넘어가지만 책임감이 없으면 사랑을 지키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참된 사랑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나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상대의 허물을 씻어주고, 닦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둘째,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서로를 돌보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사랑이다. 수고와 희생과 고통이 없는 사랑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오늘의 기도
우리 안에 헌신적인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진정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삼영 목사
포항노회


화-마음의 평안은 '감사'
본문 : 고전 1:4
찬송 : 429장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우리를 질식하게 만들고 있다. 빈부격차, 정의상실, 권력의 타락, 정경유착, 끝없는 불황, 청년실업, 노후대책 등. 특히 요즘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백성들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여 정원스님이 분신자살까지 하였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려와 근심과 분노의 포로가 되게 했고, 그로 인해 평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음의 평강을 잃으면 질병에 쉽게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마음을 평안하게 지키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런데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는 일은 어려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감사하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혼탁한 시대 속에서도 바울이 감사를 유지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사뭇 우리와 다른 차원의 감사 조건을 내걸고 있다.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그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을 돌렸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옛말이긴 하지만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경쟁하는 인간의 속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누가 나보다 좀 잘하는 것 같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래서 그의 장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단점을 기어코 찾아낸다. 아니면 그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꼭 꼬리표처럼 그 단점의 말을 붙인다. "그 사람은 다 예쁜데 코를 수술 했어" "그 사람은 똑 부러지게 일은 참 잘하는데 정이 없어" "그 사람은 다 좋은데 사실 성격은 지랄 맞아…" 남이 가진 것,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 아파 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경향이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 10:24)"는 말씀을 지켜 행하면 좋으련만 우리 성도들도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일텐데 받은 자를 시기하니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생각하며 원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이 받은 은혜를 무시하거나 또 그와 경쟁적인 구도 속에서 신앙의 우월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진정으로 신앙이 성숙한 성도는 남이 은혜를 받으면 그 주신 이에게 감사를 돌리는 사람이다. 내 마음이 내킬 때만이 아니라, 기분 좋을 때만 아니라, '항상'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을 소유해 주님께 칭찬받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게 하시고, 무엇보다 이웃의 축복받음에 진심으로 축하하며 감사하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송규 목사
예일교회


수-아름다운 길
본문 : 요 14:1~6
찬송 : 449장

지난해 6월 17일 새벽 1시 고속고로에서 40대 정모 씨가 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명사고가 고속도로에서 났다는 점이요, 어처구니없는 것은 경찰차에 치어 사망했다는 점이요, 참담한 것은 신고를 받고 구해주려 오던 차였다는 점이다. 길에서 일어난 일이다. 인생은 길을 가는 것이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어떤 길이 아름다운 길일까?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 설교의 서두이다.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그 길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어느 길이냐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길은 사람이 오고 가는 곳으로 첫째,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 둘째, 방법을 나타내는 길. 셋째,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 있다.

첫째, 예수님이 길(way)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그(예수님)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되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말씀(Logos)이시다.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신 5:33)." 십자가의 도, 그리스도의 도는 말씀이다. 우리 인생길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한다. 순종함으로 그 길을 가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규범(rule)이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나를 따라 오라'하심은 제자도의 길이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하심은 십자가 길이요, '너는 나를 따르라'하심은 사명의 길이다.

넷째, 새로운 길, 구원의 길이시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1)"의 '별세'라는 단어는 '엑소도스'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여신 구원의 길이요, 새로운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여신 길이다. 그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새로운 살 길 즉 구원의 길이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가는 길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의 길, 의의 길,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충성된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식 목사
화순장로교회


목-성도는 지혜로워야 한다
본문 : 전 7:1~10
찬송 : 492장

똑똑하려면 지식을 갖춰야 하고, 지혜로우려면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 똑똑하나 지혜가 없으면 칼을 든 아이와 같고, 똑똑하고 지혜로우면 검을 든 장수와 같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식을 갖춘 똑똑한 사람인 동시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첫째, 지혜로운 성도는 재물보다 이름을 존귀히 여긴다.
이름은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의미한다. 재물은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럴지라도 재물이 내 존재, 내 인격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재물로 내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이 친히 시인하시고 인정하실만한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 재물로 자신의 존귀한 이름을 만들어 남기는 성도가 지혜롭다. 

둘째, 지혜로운 성도는 인생을 즐기기보다 의미 있게 산다.
아이가 태어난 곳에는 기쁨이 있고 사람이 죽은 곳에는 슬픔이 있다. 출생하는 사람 앞에는 죄 많고 험한 세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불확실한 삶이 놓여있지만 죽은 사람 앞에는 영생복락의 천국, 참된 쉼과 안식, 영원히 보장된 삶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잔칫(출생)집은 웃음과 즐거움이 있지만 인생을 망각하게 만들고, 초상집은 울음과 슬픔이 있지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생의 쾌락을 찾아 즐기기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성도가 지혜롭다.

셋째, 지혜로운 성도는 칭찬보다 바른 말을 들을 줄 안다.
지혜자의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말이고, 우매자의 노래는 듣기는 좋지만 전혀 덕이 되지 않는 칭찬을 의미한다. 칭찬은 사탕처럼 달콤하지만 심령을 깊이 병들게 만들고, 바른 말은 보약처럼 쓰지만 겸손히 받아들일 때 심령과 인격을 튼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매자의 노래와 같은 칭찬보다 심령과 인격을 튼튼하게 만드는 바른 말을 듣고 자신을 고칠 줄 아는 성도가 지혜롭다.

넷째, 지혜로운 성도는 시작보다 나중을 창대하게 한다.
인생을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을 멋지게 시작했을지라도 나중이 미약하면 어리석은 생애가 되고, 초라하게 시작했을지라도 나중이 창대하면 지혜로운 생애가 된다. 마지막 하나님이 부르실 때 창대한 사람이 성공자요 승리자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창대함을 위해 현재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지혜롭다.

성도는 육체적 쾌락을 위해 살지 않고 영혼의 즐거움을 위해 살며, 현재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위해 살며,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송받기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받기 위해 살며,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 천국을 바라보는 지혜자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매한 삶을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부터 천국을 바라보며 지혜자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결단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세 목사
황금동교회


금-오직 은혜
본문 : 마 14:22~27
찬송 : 310장

세상을 사는게 힘든 이유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가 잘 된다고 해도 계속 잘 될 거라는 보장이 없다. 본문의 풍랑을 만나기 전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축제를 즐겼다. 그런데 지금은 생사의 기로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 지금 일이 잘되는 것으로 우쭐 하지 말라. 언제 풍랑이 올지 모른다. 지금 어려움으로 고통 속에 힘들다고 절망하지 말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돌아보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첫째, 풍랑속으로 내몰으신 주님.

22절에 "즉시 제자들을 제촉하사 건너편으로 가게하시고…"라고 했다. 순종했는데 광풍을 만났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병이어 사건은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제자들도 흥분했을 것이다. 남은 떡이 12광주리니 밤을 새워 축제라도 벌어질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사탄이 마태복음 4장에서 했던 시험이다. 제자들을 보낸 주님은 따로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14장 13절에도 "따로 빈들에 가시니"라고 했다. 사람도 아무것도 없는 곳, 오직 하나님과의 소통이 유일한 곳. 성공과 번영, 부흥과 성장보다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다.

둘째, 밤사경에 오신 주님.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다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게 오신 시간이 밤 사경~새벽 5시경이다. 제자들이 배를 탄 시간이 '저물매 해질 무렵, 저녁7~8시'이고 풍랑이 밤 9~10시에 불어왔으니 족히 6~9시간을 풍랑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 6:48)"도 즉시 도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밤사경에 오셨다. 전직 어부들이 많은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의 풍랑은 이미 겪어 본일 일 것이다. 자기들의 경험과 실력으로 충분히 감당 할 수 있을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그간의 경험으로도, 기술로도 감당이 안되어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한 그 때가 밤사경이었다. 주님은 밤사경이 되도록 기다리셨다. 물에 빠진 사람이 발버둥 칠 때는 구하려는 사람도 위험하다. 힘이 빠져야 한다. 지금 힘들어 죽겠는가? 그러면 주님이 오실 때다. 내 노력으로 안되는가? 이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사람이지 않는가?  

오늘의 기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지만 주님이 주인임을 알기에 담대하게 하소서. 혹시라도 성공에 눈멀어 하나님과의 소통에 게으르지 않게 하시며 내 능력과 경험, 최선을 넘어 은혜로 더욱 풍성한 성도된 자랑과 간증이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현 목사
양평명성교회


토-생명의 주관자
본문 : 창 30:22~24
찬송 : 380장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자를 만들 때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 그 후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자녀를 잉태하게 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면 아기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도 아기를 갖지 못해 고민하는 부부들을 종종 보게 된다. 생명 탄생은 하나님의 창조와 자연적인 출생과 성령의 잉태로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든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첫째,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22). 라헬은 야곱과 결혼함으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임신하여 아들 요셉을 출산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잉태하도록 태를 여시면 생리적으로는 불가능함에도 자식을 낳는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임신도 출산도 가능하다.

둘째, 태를 닫으시는 하나님. 2006~2010년에 건강보험 심사 평가원에서 불임에 대해 분석한 것을 보면 30대 불임부부가 급증하는 추세인 것이 조사됐다. 태를 열어서 잉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때로는 태를 닫으셔서 임신을 못하게도 하신다. 한나도 결혼을 했지만 여호와께서 임신을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라헬에게 무자의 서러움을 체험하게 했다. 하나님께서 임신도 하게 하시고 출산도 하게 하셔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고 자녀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 바란다.

셋째,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부모가 자식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범죄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배반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는 행위이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사람의 생명은 우연히 존재했다가 우연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나에게 생명이 있음을 감사하자.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으로도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생명을 주셨고, 생명이 있음을 감사하자.

오늘의 기도
한 생명이 천하 보다 귀하다고 했으니 내가 귀한 것처럼 남의 생명도 귀함을 깨달아 이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영 목사
충절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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