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1월 21~26일

[가정예배]11월 21~2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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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8일(금) 11:01

월-고난이라 생각될 때
본문 : 막 4:35~41
찬송 : 446장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과 눈으로 볼 때 사랑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 '어찌하여'라며 질문한다. 예레미야도 동일한 질문을 한다.
 
본문의 제자들은 말씀을 받은 이후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가는 상황에 큰 광풍을 만나고 바다의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된 상황을 맞는다.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환경적 어려움이 일어난 장면이며 여기서 제자들의 실수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배에는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상황에 일어난 고난이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믿음의 현장에서 고난이라 생각되며 이해할 수 없는 현장을 만날 때 대처할 지혜를 본문을 통해서 알게 하신다.
 
첫째, 찾아가야 할 대상이 예수님이다.
 
우리의 결정과 선택을 통해서 믿음과 주님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나바의 선택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결정 속에 복된 믿음의 선택을 본다.(행 4:36~5:2) 두 강도의 결정도 마찬가지이다.(눅 23:39~43)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선택의 지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시 1:1)
 
고난이라 생각될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깨운다. 낙심하기 쉬운 현장과 고난의 현장이라 생각될 때 찾아가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분의 자녀를 지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의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찾아가면 치유가 있고 쉼이 있고 천국이 있음을 알려준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찾아가야 할 대상이 예수님이심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둘째, 견고한 믿음으로 바꾸어 주심을 알게 하신다.
 
믿음의 성장은 말씀을 들을 때이다. 또한 이적의 현장을 보면서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제자들의 입술은 두려움의 입술이지만 예수님의 입술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는 능력의 입술이다. 고난의 현장이라 생각되었던 바람과 바다도 다스림을 받는다. 이런 이적의 현장들은 믿음의 견고함과 전도의 기회가 된다.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찾음으로 견고한 믿음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고난도 대처의 방법에 따라 쉼과 평안이 있고 견고한 믿음의 현장으로 바꿀 수 있는 지혜를 보여준다. 이런 믿음을 회복함이 기도가 되고 소원이 되는 성도는 아름답다. 성도가 이 풍요로움을 누려야 삶으로 전도가 가능하게 된다.
 
삭개오는 주님을 찾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았고 견고한 믿음이 되니 가난한 자가 보였고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삶으로 다짐한다. 주님을 찾을 때 견고함으로 바꾸시는 은혜를 찬양하자.
 
오늘의 기도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을 찾지 못하고 내 방법을 고수했음을 회개합니다. 고난의 현장이 우리를 견고케 하여, 삶으로 전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종주 목사
광주대인교회

화-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
본문 : 롬 1:14
찬송 : 502장

 오늘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를 '빚진 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위대한 바울의 생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한다.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였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갚아야 할 빚'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면 어떤가? 참으로 고통스럽다.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빚을 청산하려고 한다.
 그는 복음의 빚을 갚으려고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다. 로마제국 구석구석을 발로 밟고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명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줄 알았다. 그래서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맺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교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으며, 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가 되게 하였다. 바울이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는지는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복음의 빚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복음의 빚진 자들이다.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수고로 복음을 받았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 그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버렸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복음에 빛진 자들이 아니겠는가? 우리 또한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면치 못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에게 그 말씀을 전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복음의 빛을 갚지 않을 때,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바울의 생애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도 아니요,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도 아니며, 높은 학문과 지식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강렬한 자의식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온 천하를 밟고 또 밟고 다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된 의식과 행동들을 버리고, 철저히 복음에 빚졌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복음의 빛진 자들입니다. 복음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영희 목사
함해노회

수-알렉산더 대왕의 빈 손
본문 : 창 3:19
찬송 : 491장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삶과 죽음이 인간이 겪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며, 두 가지는 맞물려 돌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음을 보여준다.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를 맴도는 고장난 수레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치부하고, 사는 것에만 몰두한다. 그래서 잘 살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도록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서로 많이 가지기 위해 속고 속인다.
 어린 시절, 특별히 가지고 놀만한 것이 없어 땅따먹기 놀이를 많이 했다. 서로 땅을 많이 먹기 위해 '선이 물렸니, 안 물렸니, 반칙이니'하며때론 놀이 중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밥 먹자"고 부르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땅들을 발로 쓱쓱 지워버리고는 어머니를 따라간다. 왜냐하면 그 땅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가장 불쌍한 아이는 저녁이 되어도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어머니가 없는 친구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이 땅에 살면서 몇 평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간가고, 억울하고 분해서 통한의 눈물도 많이 흘린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집, 돈, 명예, 권세를 다 내려놓고 이 땅을 떠나야 한다. 허무한 것이 인생이다. 좋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던 왕이다. 그는 20세의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고 그리스 반도의 맹주로 선출되었고, 파죽지세로 소아시아 반도와 페르시아, 이집트 심지어는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다. 그러던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병들어 죽게 되었다. 죽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였고, 아까운 땅이었다. 그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을 했다. "내 관을 짜라 그리고 양손을 밖에 내어놓을 수 있게끔 구멍을 뚫어라. 내 관을 덮되 양손은 하늘을 향해서 쳐들게 하라."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휘하의 장병들로 하여금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훈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많은 것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제는 인생이란 누구든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허무한 것임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 땅을 떠나야 할 때 가장 불쌍한 자가 누구일까? 살아서 먹고 사는 일에만 골몰하다가 죽어서 내 영혼이 갈 곳 없는 자,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자가 가장 불쌍한 자이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자.
 
오늘의 기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반겨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형곤 목사
다사교회

목-예수님의 감사
본문 : 마 14:19~21
찬송 : 85장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며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명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갖고 있던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들을 잔디 위에 앉히셨다. 누가 보아도 위기 상황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축사란 감사 기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다.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을만큼 풍성한 기적이었다. 감사하면 작은 것이 커진다. 감사하면 보잘 것 없는 것도 풍성해진다. 감사의 능력이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오병이어는 방금 전까지 제자들의 손에 들린 것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의 손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제자들은 오병이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것 뿐이라며 푸념했다. 인생을 움직이는 힘은 날카로운 분석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로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자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감사가 없었다. 감사가 없기에 절망에 이른다. 감사가 없는 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이다. 믿음의 크기는 감사의 크기와 비례한다.
 
감사는 조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다.예수님은 부족함 중에 감사 기도를 드렸다. 앞 길이 막막할 때, 가정과 자녀, 교회와 나라가 처한 현실 속에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간구에 앞서 하나님께 먼저 감사 기도를 드려보자. 감사하면 어려움 속에도 새로운 지혜와 감당할 힘을 주신다. 감사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입시철이다. 취업의 문은 바늘 구멍이다. 자녀가 형통하게 되는 비결은 감사하는 자녀로 만드는 것이다. 감사하는 자세는 어떤 능력이나 자질보다 중요하다. 감사가 성공의 비결이다. 부모가 먼저 감사 기도를 삶으로 보여주라. 자녀도 감사 기도하는 자녀가 된다.
 
가장 우선해야 할 신앙교육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녀로 양육하는 것이다. 감사를 배운 자녀는 실패 앞에서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감사를 배운 자녀는 성공 앞에 교만하지 않는다. 감사하는 자녀는 눈 앞의 결과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자녀가 건강한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초석이다.
 
감사는 감사할만한 조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관자이심을 믿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 인생은 감사하는 만큼 펼쳐진다. 풍족함이 감사의 조건이 아니다. 감사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풍성케 하신다. 예수님처럼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삶의 변화는 작은 감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의 기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사람으로 살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한국지도자들에게 고함
본문 : 삼상 12:1~5
찬송 : 515장

왕이 도덕성이 없으면 백성이 고달프다. 나라에 혼란이 온다. 누구보다 지도자가 올바르게 서서 시민 앞에 나아가야 한다. 오늘 성경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의 퇴임사다. 사무엘 사사가 퇴임하고 새로운 왕정시대가 열려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이다. 사사 퇴임자리에서 사무엘은 자신은 떠나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이런 왕이 되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그 귀한 자리에서 왜 사무엘은 "내가 누구의 소를 나귀를 빼앗았는가? 누구를 속이고 압제하고 판단력이 흐리고 뇌물을 받은 것이 있는가? 만일 내가 그렇게 통치를 했다면 내가 갚겠다"고 했는가? 왜 사무엘은 백성과 기름부음 받은 사울과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고백하는가? 그리고 왜 백성들은 사무엘사사가 "우리를 속이지도 압제하지도 빼앗지도 아니하였다"고 대답할 뿐만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까지 그렇게 대답하며 증언을 했을까?
 
그것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할 때 자신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왜 그는 자신의 거짓 없는 통치와 도덕성을 내세우고 있는가?
 
그것은 사무엘이 자신의 거짓 없는 진실함을 자랑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자신의 깨끗한 통치를 내세우려고 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고백하고 있는가?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깨끗한 퇴임사는 모름지기 왕이 될 사람은 백성과 하나님 앞에서 늘 압제도, 빼앗음도, 뇌물도 없어야 하고 더더욱 거짓과 속임이 없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는 백성을 대할 때 하나님을 대면하듯이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고 하나님 사랑하듯이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그의 퇴임사에서 강조한 것이다. 이런 하나님 앞에 선 지도자가가 위대한 지도자며 백성들의 존경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이다. 이 세상 모든 지도자들은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으로 통치해야 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어찌 이 꼴이 되었는가? 대통령은 수사를 받고, 비서들은 체포되고, 검찰들은 자기 칼에 취해 칼춤을 추고, 국정원은 시민 민주주의를 종북으로 뭉개고, 방송과 언론들은 정보를 비틀어서 떠들고 CEO들은 강자들에게만 뇌물을 찔러 준다. 사회 모든 분야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타락했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이다. 시민들이 작은 촛불을 들었다. 변혁의 촛불이다. 꺼뜨릴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다. 촛불로 썩은 대한민국 사회를 개혁뿐 아니라 혁명까지 이르게 하자!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특히 크리스찬으로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성도에게 사사 사무엘의 퇴임사를 듣자.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은 것이 있느냐? 누구를 속인 것이 있느냐? 압제한 것이 있느냐?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나와 크리스찬 지도자들의 가슴에 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오늘의 기도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으로 통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명갑 목사
부여교회

토-감사하는 자가 되라
본문 : 골 3:12~17
찬송 : 587장

예루살렘 유대교 회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관광객이 유대인의 예배를 지켜보다 가이드에게 물었다. "가이드님, 예배를 드릴 때 '모세'이야기만 나오면 왜 사람들이 투덜댑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자 가이드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모세가 인도한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만 있는데, 이집트에는 석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투덜거릴 수밖에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감사이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조건이나 주위 환경에 관계없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그러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덕목이다. 본문 15절은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감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 최고의 찬양이다. 감사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강할 때나 약할 때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
 
첫째, 그리스도를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얻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둘째, 교제를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한다. 나아가 교회를 통해 성도들과 교제하고 구원의 은총을 나눈다. 그러므로 영적인 공동체인 교회를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셋째, 이웃을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호젓한 밤길을 걸을 때 곁에 누가 있다면 외롭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또 다른 인간과 함께 있음은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무인도에 혼자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웃이 있기에 나의 참된 가치가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원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감사의 산제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기도
 
감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옵소서. 감사를 통해 교회의 소중함을 알게 하옵소서. 감사를 통해 이웃이 함께함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윤근 목사
창원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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