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1월 7~12일

[가정예배]11월 7~12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11월 08일(화) 17:26

월-문제 앞에 선 자
본문 : 왕하 6:14~17
찬송 : 383장

얼마 전, L그룹의 부회장과 전직 시장인 두 분의 장로님이 며칠 사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생겼을까? 아마 그분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 있었기에 그랬으리라.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많은 문제들을 만난다. 문제 앞에서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면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다.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면 그때마다 엘리사가 여호람왕에게 알려주어 미리 방비를 함으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에 아람왕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잡기 위해 많은 병거와 군대를 동원하여 도단성을 포위한다. 아침에 많은 병거와 군사가 에워싼 것을 본 사환은 놀라서 그 주인 엘리사에게 달려가 알린다. 그 때 엘리사가 한 첫 마디는,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보다 더 많다"는 것이었다. 문제 앞에 선 우리들이 들어야 할 뉴스는 바로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니 비로소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선 것이 보였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 나타났던 바로 그 불말과 불병거가 보였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사환과 엘리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환은 환경과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았더니 적군의 병거와 군대만 보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기도하여 영안으로 보니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보였다. 사환은 눈에 보이는 대로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절망하였으나 엘리사는 영안을 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승리하였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 때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절망한다. 또 사람을 바라보면 어떤가? 착하고 여리기만 한 성도들이 싸우기에는 너무나 강한 사람들이 온통 나를 노리고 있다. 나의 학벌이나 능력, 배경으로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자들이 사방에 가득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다. 저들은 거인의 자손이요 우리들은 메뚜기와 같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마음이 든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 같은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엘리사는 믿음의 눈으로 환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환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했을 때 사환의 눈이 열리며 불말과 불병거 곧 하나님의 군대가 보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영안이 열리며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보인다.
 
이제 문제 앞에서 절망하지 말고 문제를 통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엎드려 기도하며 문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오늘의 기도
 
인생 가운데 결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홍해를 만날 때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형곤 목사
다사교회

화-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 : 마 24:1~2
찬송 : 585장

예수님께서는 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외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는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부심이며 자랑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을까?
 
그런데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신비한 행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누어졌을까?(마 27:51) 왜 이런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성전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골고다와는 수십미터 이상 떨어졌는데 왜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일까?
 
이 두 사건은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계시를 하신다. '성전은 사람이 영광 받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곳'이라는 것을 계시해주신 것이다.
 
당시 대제사장과 성전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양과 소를 팔고 세금을 거두어 탐욕을 채웠다. 이미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고 사람의 영광만 가득한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청소하실 때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전을 청소하시고, 예수님의 생명의 부활로 새 성전을 탄생시키셨다. 인간의 탐욕과 인간의 영광이 있는 성전을 치우셨다.
 
중세시대 교회는 인간의 영광과 탐욕으로 가득한 교회였다. 첫째,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신격화했다. 둘째, A.D.1190년부터 면죄부를 팔았다. 셋째, 마리아를 신격화 했다. 중세교회가 인간의 영광으로 가득찰 때 하나님께서는 개혁을 시키셨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거룩한 교회인가? 복음주의 맥아더 목사는 "한 때 세계 교회의 희망이었던 한국교회가 100년 만에 끝났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교회에 재물을 쌓고 약자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까?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주님처럼 소외된 이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성전에서 인간의 영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그리하여 한국교회를 살리자. 이를 위해 기도하며 실천하자.
 
오늘의 기도
 
인간의 욕심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곳으로 전락한 성전을 허무신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도 말씀을 통해 깨달아 사람의 영광만 가득한 교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약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들을 진정으로 품고, 함께하며,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디시 한번 세계 교회의 희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명갑 목사
부여교회

수-누가 좋은 열매를 맺나?
본문 : 눅 6:43~45
찬송 : 289장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농부가 무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 가슴 졸이며 밤잠을 설치고, 수고하고, 애쓴 대가를 열매로 보상 받는 계절이다. 그런데 농부가 밤잠을 설치고 아무리 수고를 했어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그 나무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다. 좋은 나무란 좋은 열매를 맺었을 때 비로소 좋은 나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탐스럽고 튼실한 수확의 기쁨을 줄 때, 그 땅은 좋은 땅이라 인정되며 농부의 사랑을 받게 된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맺는 삶의 열매와 삶의 결실이 바로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다. 내가 지금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은 나를 표현하고 있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나의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삶을 이루며, 거기에 대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거두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들을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날마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첫째로, 선한 일에 영향을 받으며 선택한다. 둘째로, 악한 일에 영향을 받으며 선택한다. 우리의 선택은 크게 보면 이 둘 중 하나이다. 매 순간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 갈등을 겪지만, 결국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선택한 그 결과의 열매를 수확하며 산다.
 
만약 잘못된 선택으로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을 우리가 매 순간 의지할 때, 후회하지 않는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건강한 생각을 부어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에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동행하고 있지 않은지가 드러나게 된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가 맺는 삶의 열매로 우리를 평가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오늘의 기도
 
오늘도 선택의 갈림 길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혜와 분별력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영희 목사
함해노회

목-듣는 기도의 훈련
본문 : 행 27:13~26
찬송 : 360장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문제는 기도생활 중 말하는 기도가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렇게 해야 자기 기도에 만족(?)한다. 기도 후 하나님의 인도를 알지 못하면 그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기도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한 후 하나님 동행의 깨달음이 있다면 그 기도는 감사와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불안과 염려를 대처하는 방법이 성도는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 혹은 자신의 이론에 의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해 불안과 염려를 해결 받을 수 있다.
 
본문에서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중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난다. 사람들은 풍랑으로 인해 심히 애쓴다.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던 짐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배의 기구들을 내어버린다. 그러나 큰 풍랑이 여러 날 계속되므로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다. 여기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자기들의 불안과 염려를 없애기 위해 최선과 방법을 다했지만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살다보면 최선의 노력과 방법 속에 답이 없고 좌절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이런 불안 속에 바울이 말한다.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그리고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신념이나 믿음의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들려주신 말씀의 선포의 내용이다. 23절의 '어젯밤'은 불안의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누구나 '어젯밤'의 상황은 다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기도했고 그 기도 중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들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기도 후 듣는 기도, 깨우쳐 주시고 알려 주시는, 즉 기도 후 기다리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알려준다. 어떻게 보면 기도 후 깨닫게 하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준다.
 
불안과 염려가 엄습할 때 풍랑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다. 어려울 때 사람들은 낙심한다. 자신의 방법대로 한다. 이런 사람은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으로 계속 어둡게 된다. 어려움과 불안과 염려가 밀려올 때가 주님을 찾을 때이다. 그러나 기도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현실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삶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안심하라' 말할 수 없고 복음의 생명력을 잃는다.
 
기도 중, 기도 후 인내가 필요하고 그 분의 음성을 분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주실 음성을 소망할 때 주님은 바울의 생각과 입술을 사용하듯 나의 생각과 입술을 복되게 사용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듣는 기도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인도와 깨달음을 듣게 하시고 나의 생각과 입술에서 '안심하라'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종주 목사
광주대인교회

금-감사하는 말을 하라
본문 : 엡 5:4
찬송 : 425장

성도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꽃은 감사다. 감사가 성숙한 신앙의 지표다. 불평은 감사를 잃어버린 증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면 불평이 둥지를 튼다.
 
우리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평한다. 거룩하게 살지 못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지 못해서, 믿음이 성장하지 못해 불평하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불평의 뿌리에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싫어하는 불신앙이 있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다. 왜인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사가 없으면 에덴동산의 가장 좋은 것조차 선물로 누리지 못하게 된다.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에는 불평과 의심이 싹트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며 사탄의 꾐에 따라 하나님을 돌아서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해 예배자로 헌신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어렵고 긴 훈련의 시간을 요하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계기로 실족하거나 마음이 닫혀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는 얼마나 쉽고 빠르게 결정하고 돌아서는지 모른다. 아담과 하와처럼 탕자처럼, 그 길이 필경 사망의 길인줄도 모른채 말이다.
 
감사하는 자는 조급함의 올무에 걸리지 않는다. 감사하는 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기다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증거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 쉽게 포기하고, 불평하고, 절망하고, 단념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못하면 감사가 사라진다. 감사가 사라지면 조급해진다.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고 절망하고 불평한다. 감사하는 자가 기다릴 수 있다. 감사하면 조급함의 유혹에 무릎 꿇지 않게 된다. 견딜 수 없는 상황도 감사로 승화시킨다. 성경 어디에도 불평을 정당화하는 구절은 없다. 삶이 억울할 때,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노력의 결과가 없을 때, 손해를 입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겨질 때, 불공평하다고 정의가 사라졌다고 느껴질 때조차 성경은 불평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어느 때나 감사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말씀하신다. 불평이 솟구쳐 오를만한 때에라도 감사하고, 상황에 상관없이 언제나 변함없이 감사하라고 명하신다.
 
감사는 믿음의 고백이다. 감사는 상황의 변화나 결과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감사는 지금의 상황과 상관없이 드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감사하라 말씀한다. 감사하며 살자. 감사를 말로 표현하자. 믿음의 최고봉은 감사다. 지금 우리의 말에 감사를 담아보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에 감사보다 불평이 앞섰습니다. 감사하는 말을 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상진 목사
영암교회

토-믿음과 약속
본문 : 창 15:1~7
찬송 : 267장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이다.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그러자 아브람이 이렇게 물었다. "주 여호와여,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마스커스 사람인 제 종 엘리에셀이 제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아브람은 말한다. "주께서 저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태어난 종이 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아직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아브람은 실망에 빠져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네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아니다. 네 몸에서 태어나는 자가 네 재산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드디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믿음과 관련된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이 바로 오늘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에서 '믿으니'는 구약성경 이스라엘 히브리어로 '아만'이다. '아만'은 '확고하다,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그것을 믿을 때 그 약속이 확고하고 견고히 세워지는 법이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보며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믿어야 약속이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브람도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사람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며 깊은 염려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자기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호와는 이런 아브람에게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약속을 말씀하셨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섭리였다. 아브람은 먼저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했다. 정말 놀랍고 신비한 일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믿음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믿어야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다. 이처럼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믿음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오늘도 우리의 방패가 되시며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기도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의로운 길로 행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윤근 목사
창원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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