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 31일~11월 5일

[가정예배]10월 31일~11월 5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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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8일(금) 09:54

월-있어야 할 곳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본문 : 시 23:1~6
찬송 : 400장

스위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그를 찾아 오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시편 23편을 하루에 여섯 번씩 읽으라고 했다. 약을 먹는 것처럼, 아침에 두 번, 점심에 두 번, 저녁에 두 번씩 읽게 했다. 그의 말에 따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우울증이 떠났다. 시편 23편을 자주 읽고, 암송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아름답게 하기에 유익하다. 꼭 암송할 필요가 있다.
 
시편의 구조는 탄원시로 시작해서, 감사시로, 찬양시로 끝난다. 마치 믿음의 여정과 같다. 처음에는 탄원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순간순간 경험하며 감사로 바뀌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된다.
 
시편 23편은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아뢰며 도와주실 것을 탄원하는 시다. 편안할 때 쓰여진 시가 아니다. 찬양과 기도가 멈출만한 상황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할만한 상황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탄원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 목자로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삶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아름답던 초원도 맹수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초원은 양치기 좋은 곳이지만, 목자들에게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양치기였던 다윗은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서 살아도 목자가 없이는 결코 좋은 곳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참 목자만 있다면, 맹수가 나타난 위험한 상황이라도 문제가 없음을 확신한다. 참 목자이신 하나님만 계셔도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은 이와 같은 신뢰의 믿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있어야 할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있어야 할 곳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하시며,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한다. 다윗은 고백한다.
 
"지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지만, 다시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결국 압살롬의 반역은 실패로 끝나고, 도망쳤던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능력이다. 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지금 힘들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그 분의 계획은 온전히 내 삶에 이루실 것을 믿고 나아간다. 하나님은 그에게 탄원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이 나를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시고, 그 곳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임을 믿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성인 목사
영산포중앙교회

화-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본문 : 롬 1:16~17
찬송 : 542장

어느 시대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의인이 있었다. 의인이 되는 그 믿음이 무엇일까? 나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뤄 놓으신 복음의 의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그 믿음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뤄놓으신 복음의 의가 무엇인가? 성경에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죄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모든 사람은 다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심판의 때에 죄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셨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의 심판을 담당케 하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영적교환의 신비가 일어나게 하시는데 나의 모든 죄의 저주와 멸망은 십자가의 예수께로 다 빨려가고 동시에 내게는 예수 십자가로 이루신 의로 뒤집어 씌워진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로 이루신 하나님의 의만 나타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정죄함이나 심판에서 자유하게 하신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십자가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현하고 구원을 이룬 복음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첫째, 회개의 열매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스스로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의 의를 믿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성을 그대로 가진채 죄악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알게 모르게 생각과 감정과 말 그리고, 눈과 귀와 손발이 죄에 오염이 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더 풍성한 복음의 의를 덧입기 위해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열매가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둘째, 성화의 열매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구원의 주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주인 삼고 사는 사람들은 주께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주께서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고, 순종하며 살게 된다. 그 순종하는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게 되는데 평생을 두고 더 해 가야하는 믿음의 열매가 성화요, 내가 복음을 믿음으로 인해 의인으로 사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주님앞에 회개와 성화의 열매를 더하는 믿음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주태 목사
성지교회

수-내게 있는 확실한 소망
본문 : 행 24:14~16
찬송 : 488장

사도행전 24장에는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당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바울의 고백의 내용이다.
 
첫째,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소망은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한다. 소망은 그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 앞에'내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바른 대답을 하게 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의 소망이 있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참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의지하며 신뢰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수많은 대적자들의 음모와 모함이 있었지만 전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라.
 
둘째,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기독교에는 중요한 절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이다. 기독교의 특징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의 종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요,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의 부활 신앙을 확실하게 고백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한다. '언젠가 나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부활한다'라고.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 소망으로 인해 세상에 물들지 말고 도리어 세상을 이기는 삶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늘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인해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삼균 목사
대성교회

목-소리 질러
본문 : 막 10:46~52
찬송 : 340장

오늘의 주인공인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머물러 서서 그를 불러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셨다.
 
오늘 본문 앞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자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예수님의 삶이 어떤 삶인지 잘 알지 못했다. 또 변화 산에서 신비한 경험을 하였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가 더 큰지에 대해 논쟁을 할 뿐이었다.
 
본문 10장에는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할 때에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 이어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구할 때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이르시니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구하였다.
 
본문은 바디매오의 신체적 보지 못함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고 있지만, 실상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길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맹인됨을 알려준다. 바디매오의 외침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참으로 애처롭고 불쌍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간절히 외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들은 바디매오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는 반성과 함께 소리 질러 예수님을 머무르게 해야 할 때이다.
 
바디매오의 소리 질러 외침에 주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며 주님을 보기 원하는 바디매오의 간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는 밝아진 눈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디매오처럼 소리 질러 외치는 것뿐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발길을 멈추신다. 외치는 교회와 가정에 발길을 멈추실 것이다. 어둠이 물러가도록 어두워진 눈이 밝아지기를 간구하는 곳에 머무르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시다.
 
오늘의 기도
 
저희의 삶의 모든 것을 관여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미형 목사
생명비전교회

금-거룩한 영향
본문 : 막 1:40~45
찬송 : 96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병 걸린 자가 예수님 앞에 거리를 두고 무릎을 꿇어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자 가까이 가셔서 만져주시며 치료하셨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 당시의 법을 뛰어넘어서 그에게 가까이 가셨고 그를 만져주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거룩과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준다. 소위 말해서 거룩하다고 하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나병환자를 대하는 거룩은 접촉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를 만지시고 치료해 주셨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길 가다가 세리 마태를 만난다. 마태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날 저녁에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여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을 다 불렀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는 이상하다. 어떻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느냐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면서 예수님을 비난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의사가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냐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냐 나는 병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고 그들의 비난에 대해서 대답하셨다. 또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한참 전하시는데 어느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오려고 하였다. 그 당시에 여자와 아이는 사람 숫자에 포함 되지 않았을 정도로 천대받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구별하는 제자들을 야단치셨다.
 
예수님의 거룩한 방법은 천국을 두고서 죄와 허물 많은 이 땅에 찾아오신 것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구별함을 통해서 자기들의 거룩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의 거룩을 어떻게 나타내셨느냐 하면 죄인인 우리에게 찾아옴을 통해서, 죄인인 우리가 그분을 영접함을 통해서 예수님은 거룩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천국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방법이다.
 
우리에게는 거룩에 대해서 항상 두 가지 영향이 있다. 우리가 거룩함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상대방의 더러움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도 있다. 한 가지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 예수님의 능력은 모든 부정적인 것을 뛰어 넘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 붙잡으면 우리는 변화된다. 나를 변화시킨 예수님을 내가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 거룩한 영향을 미쳐야 한다. 거룩한 영향, 혹은 거룩한 감염을 시킬 수 있는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감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대훈 목사
창성교회

토-친구를 향한 네 친구의 믿음
본문 : 막 2:1~7
찬송 : 520장

사랑에는 크게 네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 부모님의 사랑인 '스토르게', 친구 간의 사랑인 '필리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이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빼고, 인간적인 사랑 가운데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은 '필리아' 곧 친구 간의 사랑이다.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지극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이 너무 지극하다 보니 때로는 그것이 자녀에게 강제가 되기도 하고, 비교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친구는 그렇지 않다. 친구의 사랑은 비교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친구는 무조건 편을 들어 준다. '나는 네 편이요 네가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고 마음이 상하면 누구에게 가는가? 친구에게 간다. 친구에게 위로 받고 친구를 통해 다시 힘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외롭지 않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특별히 좋은 친구와의 만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한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의 이야기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중풍병이 치료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죄사함도 받게 된다. 이 한 가운데에 네 친구의 믿음이 있었다.
 
첫째, 네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고침을 받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치유된다. 그래서 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또 5절에 보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과 치유를 선포하신다. 네 친구들의 믿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했고,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질병을 치유하시고 구원을 선포하셨다.
 
둘째, 믿음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나타났다. 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기 위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지붕을 뚫고 줄에 매달아 예수님 앞에 내리는 것이다. 믿음은 담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여기에 창조적 아이디어가 더해지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전도에도 구원의 확신,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더해졌을 때 열매는 풍성해진다.
 
좋은 친구는 인생의 복이다. 그러나 믿음의 친구를 만나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다. 믿음 안에서 참된 우정을 나눌 뿐만 아니라 구원의 동반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어 가고, 주님의 사역에 귀한 동역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상현 목사
염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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