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 3~8일

[가정예배]10월 3~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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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29일(목) 14:28

월-값이 진주보다 더한 지혜
본문 : 잠 31:10~31
찬송 : 288장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현숙한 아내란 흠잡을 데 없이 능력 있고 유능한 여자이다. 남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아내를 찾을 수 없다.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 어느 여성이라도 한번쯤은 나도 이런 여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아들이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도록 훈계하고 있다. 이 여인의 완벽함은 남편이 집안일로 걱정하거나 가족 생계를 염려하지 않게 하고, 사회에서 큰일을 하도록 후원하고 있다. 또 어찌나 슬기로운지 자녀들을 지혜로운 말로 교육하고, 따뜻한 말로 격려하고 이끌어 주고 있는 아내이다. 그래서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인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하게 될까?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삶을 가르치는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하다.
 
잠언은 우리의 삶을 교훈하고 가르치는 지혜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1:2, 5~6)"라고 했다.
 
르무엘의 어머니는 삶의 중심된 것으로, 모든 사모하는 것 가운데 가장 사모하는 대상으로, 가장 존귀한 것으로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현숙한 여인의 지혜를 아내로 맞으라고 하고 있다. 삶의 능력이며 흠이 없고 유능한 지혜를 삶의 파트너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곧 지혜는 현숙한 아내와 같다는 말이며, 능력 많고 유능한 아내와 같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 뛰어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며 현숙한 아내와 같이 내적 외적으로 가정과 교회 일터에서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삶의 중심과 근본이 되어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건강하게 치유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대로가 아닌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이다. 르무엘의 어머니는 아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강하게 가르친다. 정의로운 통치를 하라는 것이다. 또 사회적인 공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라고 한다. 고통하고 신음하며 말 못할 정도로 억울한 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현숙하고 뛰어난 지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값이 진주보다 더한 지혜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오늘도 사모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미형 목사
생명비전교회

화-귀를 기울여
본문 : 느 8:1~18
찬송 : 285장

예루살렘성벽의 공사를 마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를 초청하여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율법을 듣고 크게 감동해서 울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체험한 것이었다.
 
첫째로, 1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고 했다. 2절과 3절을 보면 "에스라가 남자와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모든 회중 앞에서 율법 책을 읽었다"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자 할 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참여했고 에스라가 읽고 해석해 주는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은혜를 경험했다. 사도행전 10장에 등장하는 고넬료도 마찬가지였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여 설교를 들을 때에도 그는 그의 가족들은 물론이요, 일가친척들과 친구들까지 다 함께 모여 말씀을 들었다. 그 때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며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둘째로, 3절을 보면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다. 귀를 기울여 잘 듣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귀를 기울여 잘 듣는다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일이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들을 때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율법의 말씀을 읽고 율법의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고 설명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를 기울여 잘 들었다. 말씀을 잘 알아듣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귀를 기울여 잘 들은 이들은 모두 은혜를 경험했다.
 
셋째로, 6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고 했다. '아멘'이라는 말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말씀을 읽고 해석해줄 때마다 손을 들고 큰 소리로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을 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때로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아멘'해야 한다. 내 생각과 달라도 '아멘'해야 한다. 심지어 내게 부담이 되고 손해가 될 것 같아도 '아멘'해야 한다.
 
은혜 받는 일에는 절대로 구경꾼이 되지 않아야 한다. 은혜 받는 일에는 절대로 조연이 되지 말아야 한다.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주연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현장에 함께 하자.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듣자.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자.
 
오늘의 기도
 
말씀을 사모하며, 들은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풍성한 은혜를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삼균 목사
대성교회

수-성숙한 그리스도인

본문 : 엡 4:13~16
찬송 : 436장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 거저는 없다. 돌이켜 보면 하나하나가 다 은혜요 감사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에게 성숙한 인격이 나타나고 삶의 향기가 있다. 또한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사랑을 가진 무한한 인내이다. 즉, 기다려 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사람의 변화를 기다려 주는 일일 것이다. 사람의 변화는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칫 서두르면 부러지고 자칫 서두르다 마음을 닫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랑과 인내로 기다려 주는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기다려 주는 사랑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길이요 때가 돼야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인격의 문제, 성숙의 문제, 나아가 신앙의 문제다. 믿을 때에 인내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믿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태도요 또 우리를 끝없이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말씀하신다(엡 4:13). 신앙인의 성숙의 모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영성이요 신앙의 성숙이다. 성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7)." 철저한 겸손, 온전한 낮아지심, 자기 비움(케노시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 세상의 가치는 스스로를 높이라고 말한다. 콧대를 세우라. 목에 힘을 주라. 목소리를 키우라.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낮아짐으로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사랑에까지 나아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모습이 있고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어지셨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닮은 철저한 낮아지심과 자기 비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서 신앙화 되고 인격화 될 때 우리는 낮아질 수 있다. 이 시대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을 닮고자 할 때 성숙한 신앙인을 통하여 낮으나 충만한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주님,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상현 목사
염광교회

목-희망을 보는 즐거움
본문 : 민 13:25~33
찬송 : 391장

사람이 어떤 시야로 보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똑같은 상황을 동일한 기준에서 바라보아도 사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매우 부정적인 시야로 보고, 어떤 사람은 매우 긍정적인 시야로 본다. 어떤 시야로 보느냐가 중요한 것은 보는 시야에 따라 그가 받아들이는 기준과 고백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1명씩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을 정탐하게 하였다. 그들은 동일한 땅을 정탐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10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한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보고를 한다. 동일한 땅에 가서 동일한 상황을 보고 왔지만 평가가 달랐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동일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어떤 이들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리고 능히 그 모든 것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해 보기도 전에 안된다하며 미리 포기하는 것을 본다.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포기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상대방을 과대평가한다. 내가 싸울 대적을 과대평가할 때 우리는 싸울 용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적을 알아야 하는데 그 적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단지 두려운 마음만 갖는 것이다.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을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내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둘째,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열등감을 가진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 셋째,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고…" 넷째, 나아가기 보다는 돌아갈 생각을 한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의 해결책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심을 믿어야 한다. 지금 현실이 어둡고 힘들어도 절망하면 안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 현실 넘어 분명히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고 계신다. 갑갑해도, 슬퍼도, 대적이 많아도, 때로 넘어져도, 일시적인 실패를 경험하고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기대하며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희망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 안에 부정적인 가치와 절망이란 단어를 빼버리고 주님과 함께 긍정적인 가치와 희망의 단어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부정적인 사고와 가치를 제하여 주시고 긍정적인 믿음과 긍정적인 가치로 주님이 일하심을 소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대훈 목사
창성교회

금-세상 끝을 기억하라
본문 : 마 13:47~50
찬송 : 180장

"천국은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과 모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모든 사람이 구분없는 공동체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천국은 마치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고 말한다(47). 각종 물고기라는 것은 물고기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어떤 물고기든지 모은다는 말이다. 교회는 어떤 기준을 세우고 못 들어오게 막는 곳이 아니다. 신분격차, 나이격차, 빈부격차, 성격차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올 수 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함께 있게 하시는 것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
 
진정으로 힘써야 할 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 기도는 제자들이 하나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다. 서로가 다름에도 하나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따라 서로를 대해야 한다. 우리는 말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르다. 주님은 우리가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내 뜻과 내 방식을 내려놓을 것을 말씀하셨다. 자신을 타인보다 겸손히 낮추며 살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야 천국에서도 서로 함께 살 수 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누구나 지금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날이 온다. 그 날에는 건강도, 재능도, 지식도, 재물도 다 소용없는 날이다. 누군가는 악인으로 정죄되어 심판을 받는다. 믿는 자들은 의인으로 인정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천국에 들어갈 영광스런 모습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다. 지금은 맘에 들지 않고, 생각이 서로 잘 맞지 않아도 서로 양보하며, 잘 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이 마지막 때에 이루실 성도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하다면, 세상의 끝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좋은 물고기는 좋은 그릇에 담기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현재의 삶을 성실하게 살자.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좋은 성도로 살면, 주님이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굳게 붙들어 주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세상 끝날에 너희는 내 손에 붙잡힌 자들로, 의인으로, 저 천국에서 아름답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라! 하나 되어 서로 붙잡아 주라! 내가 항상 함께 하리라.
 
오늘의 기도
 
오늘도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성실하며, 서로를 잘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최성인 목사
영산포중앙교회

토-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믿음
본문 : 겔 37:1~10
찬송 : 384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의 심판을 받아 나라를 잃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절망중에 있을 때 마른 뼈가 큰 군대로 회복되는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희망을 보는 믿음을 갖도록 해 주신다. 그러면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믿음은 무엇일까?
 
첫째, 여호와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이다(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뼈는 완전한 죽음이요 절망을 의미한다. '마른 뼈 자체로는 살아나는 일이 절망이지만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원하시면 능히 살아 날 것을 믿나이다. 뼈가 살고 못 살고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이런 고백이다. 주변에 가득한 마른 뼈만 바라보면 절망뿐이다. 그러나 눈을 늘어 여호와를 바라보면 마른 뼈도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는 희망을 갖게 된다.
 
둘째,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5~8).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향해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해서 대언했을 때 말씀대로 뼈들이 다시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채워지고 살아났다. 주목할 것은 마른 뼈들을 향해서 선포된 말씀 그대로 살아났다는 사실이다. 말씀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병든 것도 고치고 죽은 것도 살리는 능력이요, 죄로 죽은 영혼을 의의 사람으로 다시 살리는 전능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말씀 능력을 의지함이 어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믿음이 된다. 마른 뼈에서 큰 군대를 보는 믿음이 된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마른 뼈 같은 곤고함에서 벗어나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창조자 하나님의 능력인 말씀안에 있다.
 
셋째,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는 것이다(9~10). 말씀으로 마른 뼈에 살이 채워졌지만 아직은 활동할 수 없는 조각상같은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 조각상같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생기 즉 생명과 호흡의 공급자로서 성령이 절대로 필요하다. 마치 이 장면은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아직은 흙덩이일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비로소 살아 숨쉬며 활동하는 생령으로 되게 하신 사실과 같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거듭남의 재창조가 일어난다. 성령이 임하면 은사 임하고 큰 군대같은 사역이 일어난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되는 무한의 희망을 보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주태 목사
성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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