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 12~17일

[가정예배]9월 12~17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09월 08일(목) 10:27

월-신앙의 영양제
본문 : 빌 4:4~9
찬송 : 412장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속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고 우리의 삶은 굴곡지고 휘둘리며 힘겨운 삶의 언덕을 넘어 가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가 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언덕을 거뜬히 넘을 수 있는 새 힘을 주시려고 각종 영양제를 준비해 놓으셨다.
 
첫째, 기쁨은 태도라는 영양제. 빌립보의 주제는 기쁨이다. "기뻐하라"고 명령하셨다. 종교적 의미보다 먼저 내가 해야 할 태도를 말씀하신다.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그와 무관하게 의도적으로 기뻐할 것을 결단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므로 기쁨은 감정이라기보다 태도이다. 기쁨이 태도인 이유는 악조건의 환경이라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분은 만물을 주관하시므로, 우리의 환경이 되시고, 바람막이시며, 심령의 생수이다. 인생의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
 
둘째, 관용할 때 드리는 감사기도라는 영양제. 관용은 너그러움, 온유하게 참아주는 것이다. 관용의 삶을 살면 이웃들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아본다. 때로는 억울한 느낌도 들고, 손해도 보기도 하고 염려와 근심이 내 삶에 치명상을 입힌다. 이 마음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주님께 쏟아 놓으라. 그리하면 감사의 기도가 기다리고 있다. 내 능력으로 관용을 베풀 수 있는가? 아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기도 내용에 귀 기울이시는 주님이 내가 기도할 때, 주님은 결과를 이미 준비하고 계신다. 먼저 우리에게 샬롬의 평강을 주시되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가장 멋진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이 멋진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만날 때 강건해진다.
 
셋째, 좋은 영양제라도 먹어야 건강해진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마음이 병이 들면 우리는 행복하거나 건강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사람의 삶에 생각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 잘 알았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과 칭찬과 덕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심으면 열매를 거둔다. 바울은 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한다. 성도는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기쁨은 태도라는 영양제와 관용하며 감사기도라는 영양제를 마련 해 놓고 먹기를 원하신다. 영양제를 먹는다고 금방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꾸준히 섭취할 때 건강하고 행복해지고 신앙이 자란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할 때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오늘의 기도
 
생명의 말씀을 나 혼자 먹지 않고 함께 먹으므로 평강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정희 목사
하늘정원교회

화-깨어짐의 미학
본문 : 삿 6:11~18
찬송 : 405장

오늘 말씀에 만나는 주인공인 기드온은 미움과 연민과 그리움의 시간을 거쳐 추억을 만드는 인물이다. 기드온의 이름은 '벌목꾼' 혹은 '자르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절망적인 시대로 타작을 할 때도 포도주 틀에 들어가서 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시대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움에 떠는 기드온을 부르신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는 히브리어로'깁보르 헤하일'이다. '능력 있는 용사' 즉, '무슨 일이든지 맡겨만 주면 감당할 만한 능력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실패 속에 빠진 기드온의 자화상은 졸장부인데, 하나님은 능력 있는 용사로 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도 큰 용사로 부르신다. 실패한 자화상으로 고통할지라도 그것을 넘어서 승리하는 삶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모험을 떠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지 못하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순수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모험할 때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을 놓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믿음으로 모험을 시작할 때, 야수성이 가득한 사자로 바뀐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사다리의 맨 아래 부분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첫발을 디디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목으로 우리의 자아를 깨기를 원하신다. 사회학 이론 중에 '거울 자아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가 그대로 된다는 이론이다. 나 자신을 어떤 거울을 통해서 보고 있는가? 우리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안목과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 진정한 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의 자아를 깨고, 하나님의 안목을 찾자.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닭이 쪼는 것을 '탁'이라 하는데, 이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즉 안과 밖에서 함께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고, 우리들을 만나주시기 원하신다. 특별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만나주시고, 안아주시길 원하신다. 이제 머뭇거리는 자아를 깨뜨리고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오늘의 기도
 
믿음을 더해 주셔서 담대함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다니엘의 신앙
본문 : 단 6:10~23
찬송 : 281장

변하지 않는 신앙
 
시금석은 귀금속의 순도를 판정하는 데 쓰이는 경도가 높은 검은 빛깔의 돌이다. 시금석은 일정하고 변하지 않는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라는 말씀대로 자신이 행하던 기도생활을 그대로 하면 불이익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한 것을 알면서도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신앙이다. 예레미야 35장에는 레갑 자손이 나온다. 그들은 일천여 년 동안 조상들의 명령을 순종한 족속으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 대비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어떠한 상황 아래 있더라도 변치 않는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인정받는 신앙
 
신앙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 보다는 타인이 인정하고 보다 더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 귀한 신앙이다. 다니엘의 신앙은 다니엘을 죽이려고 음모하는 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음모 자체가 다니엘이 신앙의 사람임을 이용하여 꾸민 음모이다. 또한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서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라는 말씀대로 음모를 꾸민 무리들은 다니엘이 기도할 것을 인정하고 실행한 것이다. 다니엘의 신앙은 원수에게도 왕에게도 인정받는 신앙이었다. 사자굴에 던짐을 당하는 다니엘에게 왕이 말하기를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다니엘을 하나님을 항상 섬기는 자라고 인정한다.
 
의뢰하는 신앙


사자굴에 던지움을 당하는 다니엘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기에 그 법에 따른다. 그리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을 자신이 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불신앙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이다.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 이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사람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니엘은 던지움을 당하면서 하나님께는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사여부를 하나님께만 맡겼다. 이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구원하셨다고 왕에게 당당히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인정받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석원 목사
평강교회


목-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자
본문 : 마 27:45~54
찬송 : 341장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치욕과 고난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잔인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비참한 최후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진실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표시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고통스럽고 아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거룩함과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십자가의 복음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에 걸려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의 담으로 막혀져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죄의 담이 무너지고 다시금 화목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그냥 묵과할 수 없으므로 죄의 대가인 형벌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으로 대신하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며 하나님과 화평케 하려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십자가의 복음은 구원뿐만 아니라, 믿음의 온전한 삶의 축복도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성도의 보증이 된다. 요한계시록 7장은 어린양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놀랍게 인간의 최후를 장식해 주는 능력이 있는가를 자세히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에 각 나라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어진 자 곧 그리스도인들은 최후 흰 보좌 심판대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보증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은 현재와 내세에 이르는 영생의 축복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믿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고난의 길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 그리고 다시 오심을 약속하신 그 예수님이 우리의 복음이다. 이 복음으로 인한 구원의 신비함과 오묘함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안아 주시고 용서해 주셨는가에 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으로 살자.
 
오늘의 기도
 
날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대중 목사
고당교회

금-성만찬의 의미
본문 : 고전 11:17~21
찬송 : 198장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먹고 마시는 의식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교제와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사건 이후에 주님의 죽음을 죄인을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 이해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교제와 섬김에 대한 모범으로 파악하였다. 교회공동체들은 동일한 형식의 공동체로서 빵을 먹고 잔을 마시며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섬기는 자로서 형제자매 사랑의 공동체를 구체화시켜 갔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약자들을 섬기는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봉사를 실천함으로 예수 공동체임을 보증 받았다. 즉 사도적 섬김과 교회의 봉사하는 섬김은 개인들이 하는 섬김의 형태만이 아니라, 교회의 총체적인 섬김을 위한 기구조직의 봉사로 수행되었다. 이는 성만찬적인 식사가 가지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봉사의 의미와 뗄 수 없는 것이다.
 
누가는 주님의 식탁에서 가난한 자들과 시각 장애자들과 지체부자유자들을 향한 주님의 연민을 보았다. 주님은 모두가 혐오하는 세리 삭개오를 환대하였으며,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도 따뜻하게 환대하셨다. 죄인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져다 줄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누가는 묘사하고 있다. 한편 바울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부자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비행을 책망하고 있다. 즉 성만찬 자리에서 목격되었던 빈부간의 갈등을 보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행동은 곧 죄임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는 부유한 자들이 먼저 배부르게 먹은 후 나중에 온 가난한 자들이 배고픔을 안고 집으로 가야하는 형편이었다. 바울은 주님의 만찬에서 부유한 자들이 가져온 자신에게 속한 음식을 '똑같이' 분배하도록 요구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동등하게 분배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유한 자들이 가져온 음식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열등감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도대체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공동체를 멸시하느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도다"고 책망하였다. 이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에 기초하여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사회적 지위의 차별을 과시하는 동기로 삼는 것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다.
 
성만찬은 교회와 이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가 그 백성과 함께 임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성만찬은 타자와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사귐을 나누는 존재방식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성만찬 안에서 전 생명들이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 교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온전한 성만찬에 대한 인식을 가질 때 교회는 세상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서로 나눔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교회공동체안에서 소득의 불평등, 성차별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영옥 목사
새성교회

토-몸과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본문 : 눅 9:44~48
찬송 : 212장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께서 이 아들을 고쳐주셨다(눅 9:37~42). 그러자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놀랬다. '과연 예수님이야',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역사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눅 9:44)." 예수님도 고난이 좋았겠는가? 예수님도 사람들의 박수나 찬사가 싫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순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직은 그 때가 아니며,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 9:45)." 그러나 이것도 잠시 뿐이었다. 제자들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다(눅 9:46).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누가 제일 높으냐'라는 문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대신 어린 아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문제의 원인은 '누가 크냐' 이것이다. 부부싸움의 원인도, 친구나 이웃 사이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누가 작으냐? 내가 더 작다' 이것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 '누가 크냐? 내가 더 크다'이 문제로 싸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부유부쟁(夫惟不爭)'이라는 말이 있다. 최상의 삶은 물과 같은 것이고 그리하면 아무 다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수 있을까? 그 비결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몸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낮출 때 우리의 눈높이도 낮아지고 우리의 마음도 낮아진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벧전 5:5).
 
오늘의 기도
 
말씀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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