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8월 1~6일

[가정예배]8월 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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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7월 26일(화) 16:25

월-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
본문 : 시 19:1~6
찬송 : 477장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평이 나온다. '좋았다'란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과 계획에 적합하게 행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요, 사명이다. 그런데 자연은 이 사명을 다하고 있는데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누가 이 사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첫째는 자연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다. 시인은 태양의 찬란한 빛을 보면서 이제 막 결혼하여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에 비유한다. 그 밝은 빛의 온기를 통해 수많은 생명이 태동하고, 유지되게 하시고, 기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발견한다. 이 세상을 유지하고 경영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찬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았던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둘째는 자연이 선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2절에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말한다. '말한다'라는 동사는 무엇인가에 취하여 '말을 쏟아낸다'라는 의미이다. 날과 밤이 말을 마구 쏟아내면서 전하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이다. 그 말씀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날은 그 다음 날에게, 그리고 밤은 그 다음 밤에게 쏟아내면서 전해준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노래한다.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은 날과 밤이 나누는 대화, 찬양의 화답을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다. 죄에 오염되고 타락한 인간은 자연의 풍성한 메시지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워진 사람, 그래서 그 영혼이 살아난 사람은 자연의 메시지도 듣고, 볼 수 있다. 영혼을 소성케하고,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청결하게 하고, 의롭게 하는 말씀을 듣고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고, 닮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게 된다. 말씀으로 다듬어진 아름다운 인간의 삶과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 마음의 문과 귀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자연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보면서 우리의 눈과 귀가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명환 목사
찬동교회

화-Yes, and(예스, 앤드)
본문 : 마 12:20
찬송 : 446장

'예스, 앤드(yes, and)'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예스와 그리고'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책의 핵심내용을 전개해 나간다. 예스는 무한 긍정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한 일에 대하여 예스라고 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실수할 때가 있고, 때로 일을 그릇칠 때가 있다. 그래서 더 더욱 우리에게는 긍정의 예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무한 긍정의 예스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 긍정만 해준다면 오히려 더 큰 혼돈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자식을 훈계하지 않고 긍정만 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식을 망치게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불교의 핵심사상 중 업(카르마)이라는 교리가 있다. 이 교리는 절대 긍정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다 '전생의 업'이라면서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하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긍정만 한다면 잘못된 과거를 고치거나 그 과거에서 벗어나는 동력을 얻기란 쉽지 않다. '예스, 앤드'의 저자는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예스'를 말한 뒤, 이어서 '그리고'를 덧붙이면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조언해 주라고 한다. 사람은 같은 말이라도 잘못됐다고 충고부터 하는 사람보다는 일단 자신을 긍정해 준 뒤, 그리고를 덧붙이는 사람을 훨씬 더 신뢰한다.
 
"수고했어요. 정말로 고생했어요. 당신의 그 수고에 이것을 덧붙이면 어떨까요?"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존재만큼은 긍정해 주셨고, 언제나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너는 틀렸으니까 꺼져"라고 말씀 하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을 향하여 "예스"라고 하신다. 비록 상하고 찢긴 인생이지만 그들을 향하여 긍정의 '예스'를 해주신다. 그리고 "그러니까 너도 너(타인) 자신을 꺾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들고 낙심이 될지라도 너도 너 자신을(타인) 훅하고 꺼버리면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필자에게도 예스라고 해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그리고를 덧붙이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고 부드럽고 강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예스와 앤드가 필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예스와 앤드. 생각만 해도 위로와 용기를 주는 단어요 참으로 환성적인 조합이다. 우리의 삶에도 '예스와 그리고'가 함께 간다면 어떨까? 분명 놀라운 일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덧붙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재현 목사
충광교회

수-이제는 내 차례이다
본문 : 요 5:1~9
찬송 : 365장

예루살렘 성전에는 양의 문이 있다. 양의 문은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 옆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다. 병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연못이 기적의 연못이 된 것은 천사들이 물을 움직이면 어떤 병이 되었든지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 때문이다. 이들 중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그는 병이 깊어서 물이 움직이는 것을 봐도 움직일 수 없다. 그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제는 치유의 소망까지 사라져 버린 사람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물로 목숨을 연명했다. 이렇게 인생의 희망이 끊어져 버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주님을 만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느냐?"물으셨다. 그는 "나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이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이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연못 가까이로 기어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이미 병 낫기를 포기한 사람이다"고 답한다. 그가 병이 낫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었던 것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연못가에 누워있던 그를 찾아오셨다.


혹시 이 사람과 같이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때문에 절망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며 주저앉아 있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한다. 하나님은 가정문제, 사업의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문제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원하고 계신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병자는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도 없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일어서자. 낙심하지 말자. 좌절하시 말자. 이제는 내 차례이다.
 
오늘의 기도
 
어떤 인생의 문제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일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손문섭 목사
좋은교회

목-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본문 : 잠 26:1
찬송 : 420장

잠언 26장의 주인공은 미련한 자이다. 여기저기에 회독한 사람으로 넘쳐나는 이 시대가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지혜는 길을 잃고 머물 인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잠언은 그 지혜가 인생을 찾아 정착하고자 하는 마음을 잘 볼 수 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 '개발에 편자'라는 말이 있다. 편자는 먼 길을 가야 하는 말의 발굽에 붙이는 쇠이다. 개의 발바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개의 발에 편자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미련한 자에게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 매체를 통해 뉴스를 접할 때 마다 미련한 자가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자기 자신은 그 자리가 참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앉아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사람들이 자신이 앉은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이 사회 속에서 해내었다면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만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은 우리들 자신이 존귀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을 얻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특별한 이름에 걸맞은 지혜로움을 가지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세상에서 미련한 사람이 존귀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손가락질 하는 우리가 그 보다 더 존귀한 자리에 앉아서도 미련함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미련하면 이 세상이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비웃으며 조롱하겠는가?
 
과거에는 그래도 교회는 존중받았고, 그리스도인은 신뢰감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교회는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고, 전도가 너무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미련함을 떨쳐 버려야 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여름에 눈 오는 것처럼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추수 때 비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망치는 허망한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잘못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추수하실 때 엉망인 상태가 되어 버린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붙여 주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고, 오늘도 이 말씀을 주신다.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고,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지금 우리 모습이 이 시대 속에서 지혜로운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적절한 것인지 살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진성 목사
통영교회

금-믿음을 지키려면
본문 : 히 11:6
찬송 : 546장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빌딩이 건축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설계도를 따라 공사가 시작된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빌딩이 세워지기 위해 설계도가 필요하듯 하나님 앞에 우리의 설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처음과 나중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신 것과 또한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 상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겸손히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믿음을 지키려면 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입의 말과 마음은 직결되어 있다. 마음속에 가득찬 것이 입으로 나오고 입으로 말하는 것 또한 마음을 가득히 채우게 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처럼 혀는 작지만 온몸을 어거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믿음을 변화시키려면 그 사람의 말을 변화시켜 주면 된다. 현대의학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중추신경이 다른 신경을 지배한다. '나는 할 수 없다. 이젠 끝났다'라며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 또한 부정적이고 절망적이 되기 때문에 창조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자세는 입술로 시인함으로 얻어진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빌립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안드레는 긍정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똑같은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광야에 나가서 말씀을 듣고 수많은 군중과 함께 하루를 지냈는데 주님께서 빌립을 불러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자 빌립은 그많은 사람들에게 먹일 떡도 없고 먹을 것을 살 돈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안드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가져다 주님께 드림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안드레의 믿음을 보시고 오병이어로써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게하는 기적을 베푸셨다. 우리가 비록 보리떡 같은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붙들어 주신다.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환경이나 재물이 아니라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 가족은 믿음을 갖기 위해 늘 긍정적인 언어로 항상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우리 가정과 함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
 
오늘의 기도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입술을 지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형미 목사
예수비전교회

토-폭풍 속으로
본문 : 행 27:4~20
찬송 : 401장

오늘 사도 바울에겐 죄인이란 명패가 있다. 그는 죄 없는 죄인, 의로운 죄인, 정치와 종교의 희생양이었다. 선주도 선원들도, 함께 배에 탄 죄수들도 바울이 억울한 죄인이기에 존중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를 무시한다. 죄인이라고 무시당할 때, 바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성난 파도는 절망이었다.
 
분노는 사그러지지만 절망은 깊어진다. 절망은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고 뼈를 파고든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짐,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가는 인간실존의 절망에서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절망을 희망으로 삼아야 한다. 토마스 칼라일은 "절망은 약한 자에게는 장애물이지만 강한 자에게는 징검다리이다"라고 말했다.


백부장이 바울 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그 결과 배는 풍랑 속에서 뒤흔들리고,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 거짓된 희망에 사로 잡힌 결과이다. 이들이 위기에 봉착한 이유는 첫째로 자연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배가 간신히 무라 시에 도착하고, 간신히 미항에 도착했다. 더 이상 가면 안 된다. 그런데 자연의 경고를 무시해 파선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둘째로, 바울의 경험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번 항로는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 항로와 같아서 바울에게도 경험과 지식이 있었다. 이 시기 유라굴로 광풍이 반드시 한번은 그레데 섬을 휩쓸고 지나간다. 겨울이 지날 때가지 출항하면 안된다. 이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바울의 경고를 무시했을까?
 
첫째, 배가 컸다. 그들은 곡물 수송선인 큰 배는 광풍을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거짓된 희망이 참사를 부른 것이다. 둘째, 목적을 벗어나 다른 목적을 이루려는 심산이 빚어내 참사이다. 미항과 뵈닉스는 그레데 섬에 있는 다른 항구였다. 이들은 로마로 가기 위함 보다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고 싶었다. 무리해서 항해를 해서라도 향락의 도시인 뵈닉스에 머물기 원했다. 잘못된 결정 앞에서 바울은 단지 침묵한다. 절망인 줄 알면서 절망 속으로 들어간다. 절망 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망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을 찾겠는가? 이것이 바울의 희망이다. 바울은 죄인이 된 절망을 소망으로 사용한다. 죽으면 천국에 가기에 죽음도 절망일 수 없다. 구원 받은 바울에게 절망은 없기에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상의 절망 속에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보고 당당히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동국 목사
수원온누리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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