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 4~9일

[가정예배]7월 4~9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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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28일(화) 15:20

월-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삶
본문 : 삼상 23:14
찬송 : 304장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지켜주셨는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기록되었을 때 다윗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다윗은 매일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다. 산골짜기로, 광야로, 들로, 그리고 동굴 속으로 그렇게 도망다니며 살았다. 더구나 다윗의 곁에는 환난 당한 자, 마음이 원통한 자, 상처입은 자가 600명이나 있었다. 먹을 것도 부족했다. 마실 물도 없었다. 잠잘 곳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모습처럼 비춰졌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사랑도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믿음이 필요할 때는 바로 그때이다.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시는 사랑을 믿고 견디어 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기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났고 그 사랑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난 것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다. 아버지는 돌이 되기 전에 필자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의 부재는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두 식구가 단칸방에서 참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필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얻은 하나의 결론이 아버지가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최고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신의 가정을 이룰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지!'라고 결단했다. 그래서 필자는 5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2명은 육체로 낳았고 3명은 마음으로 낳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지금 유치원,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다. 하나님은 어린 시절 필자의 외로움을 이렇게 단번에 날려주신 것이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이지 않는가? 우리 삶의 일부분을 나누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명이다. 삶을 통해 하나님은 사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아무런 곳에 던져놓고 '살아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지금의 자리로 보낸 분명한 목적이 있다.


바로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며 사는 것이 은혜를 살고 영광을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수고 없는 사랑은 없다. 때론 힘들지만 어렵지만 지금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명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을 통해 사명을 주심을 깨닫습니다. 그 사명을 평생 살아가는 동안 이루며 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영복 목사
광안교회

화-침묵하시는 하나님
본문 : 시 13:1~6
찬송 : 366장

신앙의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온다. 나는 부르짖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생각과 느낌은 우리의 삶에 고통과 환난의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될 때 더 심하게 다가온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다윗이 바로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부르짖는 시를 자세히 묵상해 보면 이 시가 "하나님,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셨나이까?"라는 절망으로 탄식하며 시작하고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도로, 마침내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묵상하시길 바란다.
 
첫째,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숨기지 말고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놓자. 오늘 다윗이 탄식한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 같고,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요, 느낌일 뿐이다. 이때 나의 감정 생각을 속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쏟아놓자.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둘째, 슬픈 탄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다윗은 두 가지를 기도한다. 먼저 '나의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한다. 스펄전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 기도는 다윗이 그의 믿음의 눈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해석한다. 이것이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 드려야 할 기도이다. '하나님 제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게 해주세요.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보게 해주세요.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을 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윗은 자기로 말미암아 원수와 대적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이기었다 하고 기뻐할까 두렵다고 기도한다. 다윗처럼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수시로 자신을 살펴야 한다.
 
셋째,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의 슬픈 탄식은 변하여 기쁜 감사의 노래가 시작될 것이다. 자신의 영안이 뜨여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위해 간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영육이 회복되기를 기도하자. 다윗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슬픈 탄식이 변하여 기쁜 노래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눈을 밝게 하시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것이, 자기의 능력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오늘의 기도
 
나의 감정과 생각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문영민 목사
곤지암교회

수-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본문 : 눅 8:22~25
찬송 : 545장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평온하던 호수에 갑자기 광풍이 발생되고 배가 침몰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제자들은 닥친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며 결국 예수님을 깨운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신다.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우리의 현실은 생각지 않은 때에 광풍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러한 현실은 믿음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바다를 건넜지만 광풍을 만나 큰 어려움에 놓였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믿음의 사람들은 고백한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때론 광풍이 배를 덮치듯이 우리의 인생에 강력하게 밀려올 때가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 믿으면 만사가 다 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대단히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 두려움과 불안이다. 그리고 이기려고 노력한다. 본문의 제자들도 두려워 하면서도 폭풍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다. 자신의 힘으론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 없다고 꾸짖으신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상황과 믿음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힘든 문제가 일어나면 당황해 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문제들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지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반응하지만 성경은 상황이나 환경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믿음의 문제로 본다. 어떻게 이것이 믿음의 문제일까? 환경을 극복시킬 수 있는 존재를 믿는다면 환경과는 상관이 없고 믿음과 상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본다면, 환경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우리는 환경의 유무에 따라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고백은 엄청나다. 성경은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증언한다. 환경을 보는 사람은 날마다 두려움과 불안에 살 수밖에 없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주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역사를 현실에서 드러낸다. 폭풍이 잠잠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오늘의 기도
 
폭풍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성운 목사
동촌제일교회

목-인생의 고난속에서
본문 : 요 18:4~9
찬송 : 388장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궁극적 가치가 될 수 없다. 편안함은 사람을 잠들게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힘들어도 미래를 향해 도전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고난 속에서 살아내신 분이다. 본문 4절에,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신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한다. "누구를 찾느냐? 내가 바로 그 예수이다." 예수님은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과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예수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참으신 것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셨다. 고난의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그리고 고난의 결과는 기쁨이요 승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후에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다. 욥기 42장을 보면, 욥의 고난의 길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욥이 받은 고난이 크지만 그의 마지막은 큰 위로를 경험한다.
 
예수님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을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쓴잔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보내셔서 감당하도록 격려하신다. 인생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열심히 땀을 흘려서 돈을 벌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의 모습에서 그 땀의 의미를 발견하듯이 인생의 고난은 가치가 있다. 예수님이 고난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은 고난의 최종 목적을 인류의 구원에 두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실력으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셨다.
 
나쁜 것만, 고난만 보고 살면, 모든 것이 고난이고 나쁜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것만 보고 고난의 의미를 해석할 줄 알고 하나님의 계획과 사명을 알게 되면, 고난은 매우 유익하게 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게 하시고 사명을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선 목사
주향교회



금-예수님의 가족

본문 : 마 12:46~50
찬송 : 557장

1960년대에 시작된 히피족으로부터 연대에 따라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들이 만들어졌다. 딩크족은 맞벌이 부부로서 수입은 두 배이지만 아이는 갖지 않는 가족형태이며, 욘족은 젊을 때 많은 부를 축적했으나 사치와 낭비가 아니라 자선사업에 수입의 대부분을 사용하는 새로운 엘리트 부자를 지칭한다. 통크족(Two Only No Kid)은 자신만의 인생을 즐기려는 고령층을 지칭한다. 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드는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행복해 지려는 것이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신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라합은 40년 전에 있었던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출애굽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다윗 왕가를 이루는 믿음의 명문가정의 조상이 되었다. 구레네 시몬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후 거룩한 가문을 이루었다. 세리 마태는 세던 돈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했고,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예수님은 외롭고 고독한 마태를 향해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부인하며 "너는 나의 가족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출신 성분에 있지 않고 지금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가에 있다.
 
둘째, 예수님의 가족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혈연의 가족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제시하신다. 사람들이 행복하려고 만들어가는 가족의 형태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게 된다. 가족이라고 하는 중심에 변할 수 없는 진리, 생명의 핵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고, 쓴 나물을 무치고, 누룩없는 빵을 만들어 가족끼리 오순도순 식사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로 떠나도록 부름 받은 새로운 가족이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그 안에 사는 사람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그 피로 우리를 덮어 주셨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병든 몸을 고치시고, 상하고 찢긴 심령을 회복시켜주신다.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핵심가치이시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들이다. 영원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 가족이다.
 
오늘의 기도
 

온 가족이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가문으로 세워져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혜 목사
복지교회

토-메시야를 만나십시오
본문 : 마 17:1~13
찬송 : 134장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목격한 사실은, 예수님을 통해 장님이 눈을 뜨고, 귀신이 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난 지금까지의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 본질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토록 계실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매일 예수님을 만나면서도 참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여기서 만났다. 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광채가 났다고 했는데 바로 그 모습이 성령의 임재를 통해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이러한 변형된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보여지지 않았다. 세 제자에게만 그 모습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셨다. 왜 그럴까?
 
첫째는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믿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믿고, 만나고,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수 년 동안 전도하였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가 부족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기적이며 놀라운 신비이다.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우리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이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요, 은총이다.
 
두 번째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메시야)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이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많이 보았고 그 분이 베풀어주신 기적의 떡을 먹었지만 그들은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이는 구속사적 예수님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오늘 예수님은 인자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부활하면 그 때에는 말할 수 있게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오순절(성령강림)에 다락방에서 무릎 끓고 기도했던 120명의 성도들이다.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메시야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산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죽음, 투쟁, 절망일 수도 있다. 거룩한 체험에서 이제는 십자가를 질 때 제자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오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변화된 삶의 현장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도 죄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예수 믿으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예수 믿으면서도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목마른 신앙이 아닌 충만하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성현 목사
봉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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