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6월 6~11일

[가정예배] 6월 6~1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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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02일(목) 16:02

월-위기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
본문 : 마 11:28~30
찬송 : 272장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만일 고난이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다.(히 12:5~13)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진다.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본문을 통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명약을 처방해 주신다.
 
첫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영적, 정신적, 심적, 육신적, 근심 걱정을 비롯한 인간이 지고 가는 모든 고난이다. 남편, 아내, 부모, 자녀에게도 내 짐을 지고 갈 수 없고 가본들 반겨주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둘째, "나의 멍에를 메라." '나의 멍에'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도 지라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에게 예수님은 나의 멍에 십자가까지 지라 하신다. 완전히 죽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우리 주님의 처방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나의 고난의 문제를 치료하시는 명약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만이 나의 모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처방이다.
 
셋째, "내게 배우라."
 
아무리 건강하고 힘이 있는 황소라도 멍에 메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멍에를 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멘다할지라도 이리저리 날뛰다가 쟁기도 부러뜨리고, 주인도 자기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힘없는 어린 소라 할지라도 멍에 메는 법을 배우면 쉽게 편하게 멜 수 있다. 신앙생활도 위기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짐 진자의 마음자세를 배우라." 그것은 온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이다. "쉽다는 것을 배우라." 몸에 맞고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가볍다는 것을 배우라." 주님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님이 나와 함께 짐을 져주시고 장래 소망이 있으니 짐이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메주실 때 그것은 짐이 아니라 날개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는 짐은 짐이 아닌 날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위기에 대한 주님의 처방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고침 받게 하사, 이 한 주간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정순 목사
순천엘림교회

화-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
본문 : 겔 37:1~14
찬송 : 191장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죽음의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을 보여줌으로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즉 그들이 지금 고국으로 돌아갈 꿈도 잃어버렸고,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택하신 제사장 나라로서의 비전도 잃어버린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인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누룩과 소금의 삶, 거룩성을 드러내는 여호와의 군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함으로 오히려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가운데 있는 우리들이 다시 여호와의 군대로 살아나서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다고 말씀한다(10).
 
먼저는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때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말씀한다(4).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살전 2:13).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말씀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 인내함으로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리할 때 30배, 60배, 100배의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이 나타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호와의 생기가 충만하게 임하는 것이다. 에스겔이 처음에 여호와의 생기가 마른 뼈에 들어가도록 대언했을 때는, 육적인 회복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7~8). 그러자 에스겔이 재차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생기에게 선포했을 때, 생기가 그들 육체가운데 임하여 극히 큰 군대로 회복이 되었다(9~10). 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살리는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것은 한번 만의 성령 충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성령 충만을 받으므로 가능한 것이다(엡 5:18).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충만을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성령의 충만을 위해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은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의 생기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강한 여호와의 군대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 말씀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시고,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겨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의 충만을 회복시키사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생기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여호와의 군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찬 목사
울산양정교회

수-결코 정죄가 없는 삶
본문 : 롬 8:1~2
찬송 : 298장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승리의 찬가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참으로 위대한 영적 해방 선언이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얼굴 을 상상해 보라. 초조와 염려는 사라지고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난다.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실상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것은 법률적인 표현이다. 이는 '더 이상 채무자로서 갚아야 할 빚이나 받아야 할 형벌이 전혀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또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는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정죄함이 없는 상태'가 과거의 일회적인 단 한번의 사건이나,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막연한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결코 변하지 않은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정죄로부터 자유하다. 나도 나를 정죄하지 않는 삶, 그것이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로마서 1장부터 7장은 로마서 8장 1절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이 한마디를 고백하기 위해 쓰여진 밑그림과도 같다. 설교가 마틴 로이스 존슨는 "우리에게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바울이 선포한 로마서 8장 1절의 표현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데서부터 나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전의 바울과 그리스도를 믿는 바울의 삶에서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믿었던 하나님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이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의 적용을 받았지만 이제는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성령의 법'의 적용을 받기 시작하면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결코 정죄당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에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정죄를 받아 죽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대신 죄없으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정죄하시므로 율법의 요구를 100%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구원의 은혜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에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를 믿음으로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놀라운 영적해방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창근 목사
문호교회

목-말씀의 능력
본문 : 수 1:7~9
찬송 : 546장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담대함'일 것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지난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서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요단 동편에서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원래는 지금 축제가 벌어지고, 감격과 흥분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가운데 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죽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던 여호수아에게는 엄청난 부담감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갑자기 대반전이 일어난다. 1-9절까지의 여호수아의 모습은 근심, 걱정, 불안이었다면 10절부터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준비하라고 명하고, 요단을 건너 저 가나안 땅을 차지하자고 외치고 있다. 무엇이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했을까?
 
첫 번째, 말씀이 그를 담대한 마음을 갖게 했다. 6절, 7절, 9절에 계속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반복된 이유는 지금 여호수아가 두려움과 염려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여호수아의 마음에 대반전이 일어난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했다.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하니 거기서부터 반전이 시작된다. 분명 말씀이 들어오니까 여호수아의 어두운 마음이 빛으로 바뀌었다. 두려운 마음이 담대함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말씀이 그에게 담대한 믿음을 주었다. 오늘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전까지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러자 그 결과는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네가 어디로 가든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큰 힘과 믿음을 주었다. 또한 믿음이 생기니까 두려움이 아닌 담대한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주는 믿음은 우리 속에 있는 염려, 두려움, 불안을 확실히 몰아내는 능력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라는 말은 말씀을 늘 가까이하라는 것이다. 또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라는 말은 깊이 말씀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속에 머물게 되고, 말씀이 내 속에 머무는 동안 그 말씀이 나에게 역사하여 염려를 몰아내고,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고 새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담대함을 주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내가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가운데 거하고, 말씀의 권능을 의지할 때, 그 모든 두려움들이 다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폭포수같은 은혜가 있을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하시고, 말씀을 묵상하게 하셔서, 말씀의 권능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보준 목사
옥포중앙교회

금-단단한 기도
본문 : 단 6:10
찬송 : 292장

다니엘의 생애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소년시절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데서부터 시작된 이 싸움은 꿈을 해석하라는 느부갓네살왕의 광기 앞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벨사살왕 앞에서, 그리고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 앞에서까지 일생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한 도전으로 계속 되었다. 왜 '그의 인생은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까?
 
왜 세상의 악함은 번번이 패했으면서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믿음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런 악함과 상대하여 싸운다는 것이 과연 승산은 있는 일일까? 다니엘의 삶 앞에서 이런 억울함까지 느껴진다.
 
주전 605년 바벨론으로 잡혀 온 소년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과 벨사살 왕을 다 거치고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일어난 메대 왕조의 다리오 왕 시대를 살아가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높은 관료로 다리오왕의 탄탄한 신임을 받고 있는 고령의 다니엘이라면 이제 그의 삶은 좀 평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다니엘은 다시 죽을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는 이렇게 억울해서 가슴을 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니엘의 종교심을 건드려서 자신들의 목적인 다니엘의 제거를 꾀한 무리들의 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를 대적하는 세력들은 권력을 가지고 나왔다. 모든 관리가 똘똘 뭉쳐서 결코 고칠 수 없는 메대와 바사의 규례라는 무기를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다니엘이 취한 행동이 오늘 본문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이러했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우리에게 수단이요 방법인 기도가 그에게는 목적이었다. 물론 그 역시 2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기도한다.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 앞에서 그는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셨다. 일생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한 그였기에 노년에 이렇게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도를 목적으로 삼을 만큼 단단해진 그에게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기도가 그에게 힘이 되었다. 사자굴에서 나오는 것이 그의 기도제목이 아니었기에 사자굴에서 나올 때 그는 담담할 수 있었다. 무릎 꿇는 순간 그는 이미 승리했다. 다니엘은 10절에서 이미 승리했다.
 
오늘 다니엘은 단단한 믿음에서 나온 단단한 기도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에 수단과 방법이 되어 기도 제목이 점점 없어지고, 그것이 없어져도 별로 불편해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전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인생도 기도가 목적이 되는 단단한 기도를 드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경 목사
연지교회

토-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본문 : 삼하 6:1~11
찬송 : 556장

이스라엘에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갈 때도 법궤를 앞세우고 갔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에서는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법궤로 인해 큰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 돌아온 법궤는 아비나답이 자기 집에서 70년간 모셨는데, 다윗이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한다. 그런데 법궤를 운반하는 현장에서 웃사가 죽자 두려움을 느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오벧에돔이 자신의 집에서 3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모신 결과, 그와 온 집이 복을 받았다. 그러면 웃사와 다윗, 그리고 오벧에돔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첫째 웃사를 보자. 웃사는 법궤를 실은 소가 뛰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손으로 잡았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법궤를 만지면 죽는다(민 4:15)'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다. 소가 뛴다고 반드시 법궤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떨어진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했어야 했다. 상황을 따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이어야 한다.
 
둘째 다윗을 보자. 다윗은 법궤 운반을 위해서 3만 명을 동원했고, 다양한 악기로 찬양하는 가운데 소가 끌도록 했다. 최고의 정성이다. 그런데 웃사의 죽음을 보고 운반계획을 포기했다. "법궤는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이다. 후에 두 번째 시도할 때에는 "전에는 우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셨다"며 고핫 자손들로 메개 하였다. 천하의 다윗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면 실패하는 것이다.
 
세 번째 오벧에돔을 보자. 오벧에돔은 다윗이 포기한 법궤를 자기 집에 석 달 동안 정성껏 모셔서 큰 복을 받았다. 본문 11절에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며, 12절에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고 한다. 오벧에돔의 집이 큰 복을 받은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대로 잘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을 받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상황을 따라가는 신앙, 자신의 방법대로의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오선 목사
예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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