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5월 16~21일

[가정예배]5월 16~2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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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12일(목) 13:07

월-서원을 지키는 과정
본문 : 삼상 1:19~28
찬송 : 321장

오늘 본문은 한나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서원을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자녀를 낳기를 구했던 것은 자신의 수치를 씻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슬픔을 돌아보시기를 원했고 하나님 은혜의 증거를 원했다. 아들을 얻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주시면 평생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신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다면 아들을 낳으므로 그 아들로부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오늘 본문은 서원을 이행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진정한 헌신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헌신이란 신앙적인 열정에 의해 거룩한 결단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결단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과정이 필요하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까지 한나에게는 망설임과 흔들림이 있었을 것이다. 이 때 한나가 취한 방법은 최소한의 유예기간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젖 뗄 때 까지 자신이 돌보다가 젖을 떼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젖을 뗄 때까지의 기간은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이 3년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이며 지혜의 시간이다. 어머니로서 자신의 태에서 나온 자녀와 정을 나누며 또한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시간이고 어머니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의 남편은 한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또 이행하도록 곁에서 도와준다. 아내가 서원을 했더라도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서원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민수기의 규정이기도 하다. 한나가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엘가나의 동의와 헌신이 필요했다. 이제 젖을 뗄 때가 되었다. 한나는 마음의 준비를 다 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제물을 드리고 엘리 제사장에게 자신의 아들을 맡기며 서원을 이행한다.
 
하나님 앞에 헌신의 결단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실의 장벽, 자신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 어떤 약속을, 결단을, 서원을 올려드렸는가? 신앙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또한 자신이 신실한 존재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서원을 기억하고 또 서로 서로 격려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신실한 삶의 열매를 맺어가시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고 늘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로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명윤 목사
현대교회

화-예수님은 왜 피곤하셨을까?
본문 : 요 4:1~6
찬송 : 218장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 이르러서 너무 피곤하신 나머지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까지는 거리가 약 65km 정도이다. 도보로 여행하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인 만큼 피곤하실만 하다. 그러나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피곤하셔서 그랬을까?
 
본문 6절에 나오는 '피곤하여'는 원래 '열심히 일하다, 수고하다'라는 뜻으로 고난, 어려움이란 뜻을 포함한다. 또한 '자르다, 끊어내다, 슬퍼하다, 통곡하다, 가슴을 치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볼 때 본문 3절에 '떠나사'라는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라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아신 후에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신 것은 바리새인들과의 관계에서 부부가 이혼하듯이 결별한 것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과 관계 맺는 것을 단념하시고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시다가 너무 피곤하신 나머지 우물곁에 걸터앉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들과 관계 맺기를 단념하시고 떠나셨지만 먼 길 65km를 걸어 사마리아로 오는 동안 내내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다. 아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과 동행하는 제자들도 모르는 예수님만이 감내하며 가슴을 치는 통곡하는 고통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 피곤하신 나머지 우물곁에 털썩 앉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시고 또한 그 영혼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당연한 마음이라고 여겨진다.
 
생각해 보면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아닌가? 용서받은 자녀이고 탕감 받은 자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로 대체하고 '율법'을 '율법주의'로 혼돈하여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그들을 보면서,비본질에 충실한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슬퍼하신 것이다. 통곡하신 것이다. 버려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한없이 부족한 나에게도 동병상련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 가운데 바리새인들 같은 실수나 오류가 없어야 하겠다.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거나 주님이 우리 때문에 통곡하는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하겠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복음신앙의 가정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에게 이같은 동병상련(同炳相憐)의 심정이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십자가의 피의 복음이 우리 안에 사랑의 꽃을 피우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양록 목사
성광교회

수-여호와 보시기에 올바른 삶
본문 : 잠 21:1~4
찬송 : 516장

세상을 살아갈 때 나를 보는 눈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눈이다. 어떤 삶이 하나님 앞에 합한 삶일까?
 
첫째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여호와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마음은 심령, 의식, 감정, 생각, 기분, 느낌, 뜻 등 정신적 작용의 총체를 뜻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주님은 "다하고, 다하고, 다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은 언제나 형식이 된다. 전부를 다 드리지 못함은 이미 내가 하나님보다 그쪽에 더 기울어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마음을 드리면 목숨도, 뜻도 드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드리지 못하면 의미 없는 예배와 삶이 반복될 뿐이다. 사람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동기를 우선시하신다. 정직, 공의, 정의. 세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둘째로, 형식의 제사(예배)가 아닌 공의와 정의로운 삶이 아름답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신약 시대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명하셨다. 시간과 장소만 강조하는 형식적 예배가 아닌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주님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공의로운 삶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가난한 자, 고아, 빈궁한 자, 곤란한 자에게도 공의를 베풀라 말씀하셨다. 성도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자들이다. 세상의 건강은 불의한 자들에 의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소금 역할을 맡은 성도들이 맛을 잃을 때 나빠진다.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다. 예배와 삶을 일치시킴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셋째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이 아름답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혼자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나님은 그렇게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무신다. 가장 큰 무지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가장 큰 교만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불의한 형통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고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
 
오늘의 기도
 
겸손 공의 정의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순보 목사
구래중앙교회

목-말씀과 영성
본문 : 시 19:7~10
찬송 : 546장 다윗은 그의 생에 속에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사랑했다.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성전에 나아가고, 주의 임재 앞에 나아갔다. 또한 그의 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종들에게 늘 귀를 기울였다.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할 때, 갓이 그의 허물을 지적할 때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바로 회개했다.
 
첫째로 다윗의 성전건축에 대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윗은 그의 절친 나단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다윗에게 "당신의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라고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다는데 선지자가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단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을 때이다. 나단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건축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나단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말씀과 계시를 낱낱이 다윗에게 고했다. 다윗은 진심어린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영적 인격이 통하게 된 것이다. 거짓 하나 없이 받은 그대로 전하는 나단이나 나단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조금도 서운한 감정이나 불쾌함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는 다윗이나 영적 기공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자존심, 권위를 내려놓고 순종한다.
 
두번째로 밧세바의 사건에 관한 것이다.
 
삼하 12장 1절에 하나님이 나단에게 "가서 다윗에게 말하라"고 보내셨다. 나단은 부자의 악행을 비유로 들며 다윗의 악한 소행을 나무랐다. 나단은 다윗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나단은 다윗이 칼로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처를 빼앗았다고 했다. 나단은 다윗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구체적으로 말했다.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를 떠났다. 그 다음은 다윗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나단선지자의 책망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다. 다윗은 마음을 찢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치부를 덮기 위해 갖은 권모와 술수를 시도한다. 왕이라면 나단 선지자를 죽이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다윗의 겸손과 위대함은 말씀 앞에서 언제나 그의 마음을 철저하게 비움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말씀 앞에 겸손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럴 때 모든 원수도, 적도 하나님께서 친히 물리쳐주셨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의 기도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꿇기 원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시열 목사
참사랑교회

금-행복의 옹달샘
본문 : 창 12:1~3
찬송 : 414장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말씀의 내용은 절망적인 명령으로 보인다. 삶의 근거지를 떠나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본토 친척 아비집'이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그런데 거기를 떠나 하나님이 이르시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 그 하나만 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 현실이 아니다. 구체적 현실을 버리고 막연하기만 한 약속 하나만을 믿고 길을 나서야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모든 구체적 현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의지하여 길을 나섰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은 그만큼 풍성하게 아브라함의 결론이 되어 주었고, 오고 또 오는 모든 세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을 일러 '복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을 두고 복의 근원이라고 부른다는 것,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그렇게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또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 자체가 '행복의 옹달샘'이 된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본문의 말씀 위에 우리의 현실을 겹쳐놓고 볼 때 주어져 있는 모든 상황은 미래의 삶에 대한 재료가 된다. 이 재료를 가지고 행복을 만들 수도 있고 불행이나 고통을 만들 수도 있다. 조건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미래를 여는 문고리로 작용하지 않고,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고통이나 불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을 가지고 행복을 만드는 비법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현실에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을 기쁨과 행복으로 엮어낼 줄 아는 기술로서의 믿음이 절대 필요하다. 또한, 그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믿음을 쌓아가는 일, 현실적 조건이나 상황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자. 그럴 때 오늘의 주어진 조건이 바람직한 내일을 만드는 재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정이나 일터, 또는 다양한 인간관계와 같은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이 행복의 옹달샘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길이다.
 
오늘의 현실을 행복으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만들 줄 아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따사로운 목소리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세상의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해 주시고 순전한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기해 목사
광천교회

토-부모들에게
본문 : 엡 6:1~4
찬송 : 199장

본문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부모들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한다. 노엽게 한다는 것은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부모가 자기의 말이나 생각을 존중하지 않을 때, 부모가 자기를 힘이나 권위로 눌러 버릴 때 등. 아이들의 화와 노를 일으키는 원인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우리들도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힘으로 완력을 쓸 때가 있지 않은가?
 
탤런트 김혜자씨는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내 자식이라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로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순간 소년의 뺨을 치면서 "어서 물러가고 다시는 오지마!"라고 말했다. 이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당의 대 지도자인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한 도시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역시 성찬으로 쓸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조용히 "너는 신부가 되겠구나!"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이 소년은 자라나서 유명한 대주교 홀톤 신부가 되었다.
 
내 입의 말은 좋든 나쁘든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항상 희망적인 말과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자녀들은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영국의 위대한 전도자요, 세계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러는 고백하기를 "나는 내 어머니가 만든 작품이다. 내 인생의 영원한 스승은 주의 성령이었고, 나를 이토록 만든 분은 그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 나의 어머니가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다.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를 낳도록 위임받았으며 일정기간 동안 교육을 시키고 양육할 책임을 받았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칠' 책임이 있음을 마음에 새기자.
 
오늘의 기도
 
태초에 가정을 만드시고 복 주셨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과 같이 위로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아래로 자녀들을 주의 말씀으로 잘 가르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하옵소서. 믿음의 가정안에서 자녀들이 상처받지 않고 밝게 자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표 목사
범물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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