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4월 4~9일

[가정예배]4월 4~9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03월 31일(목) 10:40

월-그래도 구해야 할지라
본문 : 겔 36:37
찬송 : 369장

우리는 해결 받고 싶은 많은 문제와 소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창세기 15장 13~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태에 조성되기도 전에, 그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징치하심으로 사대 만에 애굽에서 나오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면 이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었을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때가 이르러 그저 성취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출애굽기 6장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곧 그들의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애굽 왕 바로가 고역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하고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게 하자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그 신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한 후, 70년 만에 출바벨론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도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전의 모든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할지라도 그 약속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라고 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가? 마음에 소원하는 바가 있는가? 하나님은 분명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라며 먼저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고, 출바벨론 약속을 이루시기 전에도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기도를 요구하셨다.
 
이제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자. 문제가 해결되고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할 것을 작정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셔서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길윤 목사
김해한빛교회

화-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본문 : 대상 11:9
찬송 : 288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제보다 오늘이 잘되고, 지난달 보다 이번 달이 더 잘되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저절로 잘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운이 좋아서 그렇다.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다. 외모가 잘나서 그렇다. 실력이 뛰어나서 그렇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윗은 위의 해당사항이 없다. 그는 시골 오지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모든 불행의 조건을 다 갖고 있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진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강성해졌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상 17장 45절에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의 고백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 그가 고백한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하셨다.
 

둘째, 다윗은 묻고 물으면서 강성해졌다. 그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았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영웅이 되었만 그 때부터 불행은 시작되었다. 사울은 다윗을 라이벌로 생각하고 집요하게 괴롭혔다. 다윗은 20대를 도망다니느라 허송세월로 보냈다. 긴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때 다윗은 기도한다. 고향 이스라엘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을 따랐더니 백성들과 장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왕으로 삼았다. 다윗은 이렇게 매사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사람의 방법보다 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셋째, 다윗은 동역자의 도움을 받아 점점 강성해졌다. 위대한 주연의 주변에는 훌륭한 조연들이 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주실 때가 많다. 친구 요나단부터 시작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꼭 좋은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 주셨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요압의 용맹성이 없었다고 한다면 다윗은 큰 어려움에 빠졌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협조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강성해진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매사에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윗 주변에 많은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점점 강성해졌다. 온 가족이 한마음 한뜻 되어 다윗처럼 점점 강성해지는 축복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다윗처럼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 뜻을 구하게 하소서. 믿음의 가족, 믿음의 동역자를 귀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양진 목사
월광비젼교회

수-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본문 : 히 3:12~19
찬송 : 325장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 영광에만 참여하려는 것에 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많기를 원하신다. 본문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은 대부분 어렵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기에 전도, 교회개척, 성전건축, 세계선교일 경우가 많은데 생사를 걸고 해도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다. 처음 시작하는 일은 아무리 확신이 있고 헌신을 해도 일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처럼 어렵기도 하다. 그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확신이면 이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해석하며, 중단하거나, 미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확신을 얻고 시작한 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일이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교회를 개척할 때 주님이 주신 안디옥교회의 선교비전을 확신하고, 끝까지 견고히 잡고 달려왔다. 특히 어린이 선교원을 시작하는 일에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어린이 영혼구원도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 속에 끝까지 견고히 잡고 달려왔다. 그 결과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성장을 이루게 됐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확신 속에 시작된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악한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늘 조심해야 한다. 확신이 무너지는 것은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실족하는 것과 같으므로 조심하되, 악한 마음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피차 권면해야 한다. 새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일이면 서로 지혜와 힘을 모아 중단하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끝으로,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불순종을 물리쳐야 한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이란 다수의 말을 믿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순종했다. 결과는 그들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이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갖고 믿음으로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후손들에게 분배해 주는 인생과 사명의 성공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처음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시킨다.
 
오늘의 기도
 
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이 주신 확신을 끝까지 잡고 전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웅주 목사
전민제일교회

목-옮겨지는 촛대
본문 : 계 2:1~7
찬송 : 180장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의 내용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말씀이고, 다른 내용은 경고의 말씀이다.
성경은 보복의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사 진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전한다. 성경에 이런 섬찍한 표현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심령들이 당하게 될 결론을 말하고 있다. 진멸 당하고 멸절 당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 외면당함의 경고를 받는 교회가 등장하고 있다. 소아시아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 일어난 일이다. 기록된 말씀에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경고하신다.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인인가? 에베소 교회는 말씀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통해 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하였던 칭찬받는 교회였다. 3절의 기록된 내용을 보아도 처음에는 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던 교회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가 나타나는데 처음 사랑과 열정을 상실해 버리고 만 것이다. '촛대를 옮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촛대는 성령의 임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촛대를 두어 그 등불을 항상 켜둔다는 의미는 성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의미한다. 영이 임재하시는 곳이 성소이고,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반대로 영이 떠나는 곳은 하나님이 버리신 곳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다. 영이 임재하지 않는 곳이니 더 이상 거룩한 성소가 아니다. 성소가 아닌 곳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교회가 받을 상급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를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의미와 뜻을 더욱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에 임할 생명의 관, 면류관을 가르친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에는 경고가 주어진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는데 열심을 상실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만을 가지고 오늘의 신앙생활을 감당하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천국에는 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대할 아무런 상급이 없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 직분을 명예로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씀이 외면되어지는 강단이 한국교회요, 직분자들은 넘치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믿음의 열심을 내자. 그 열심과 사랑, 열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인정받는 믿음생활로 회복되어야만 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헌신에 헌신을 더해갈 수 있는 한국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석 목사
대구제이교회

금-말씀을 듣고 선택해야 한다
본문 : 룻 1:6~14
찬송 : 350장

삶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선택이 있는 여행'이다. 선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면의 선택과 외면의 선택이다. 외면의 선택은 어떤 학교를 갈 것인가? 어느 직장에 갈 것인가? 등등이다. 그에 반해 내면의 선택은 똑같은 형편에서도 기쁨을 선택할 것인가, 슬픔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미움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외면을 선택하고자 할 때, 우리는 종종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고, 닫힌 문 속에서 살아가기 쉽다. 닫힌 문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오늘의 형편을 바라보며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결과에 매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형편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열린 문이 있다.
 
우리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너의 능력이 작다"는 말이다. 그라나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은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같은 자에게 주님은 약속해 주신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 성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열린 문으로 나아갔다.
 
오늘 말씀은 엘리멜렉 가정의 이야기이다. 엘리멜렉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이다.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한다면 왕 앞에서 나의 생각이나 나의 계획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시대는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시대였다. 엘리멜렉 가정은 안타깝게도 당시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땅,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향하게 된다. 결과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룐과 기룐의 죽음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닫힌 문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신다. 남은 가족이었던 나오미와 며느리 룻에게 말씀이 들렸고 말씀을 듣고 선택했다. 그럴 때 슬픔으로 시작했지만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고, 장례식으로 시작했지만 결혼식으로 나아가게 되고, 닫힌 문으로 시작했지만 열린 문으로 나아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말씀이 들리는 선택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첫째로, 말씀이 들리면 정직을 선택하게 된다.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자신의 형편을 정직하게 말했다. 둘째로, 말씀이 들리면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을 섬기는 자가 된다. 셋째로, 말씀이 들리면 섬기는 사람이 된다. 나오미가 섬길 때 하나님은 꼭 필요한 룻을 남겨두셨다. 그리고 룻을 통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열린 문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철규 목사
상일교회

토-예수님의 축복
본문 : 눅 24:50~53
찬송 : 304장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일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신 일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이 있을 것을 처음 알려주셨을 때만 해도 이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제자들은 없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믿지 못했다. 제자들이 처음에 보인 불신과 회의는 그들이 당초에 예수의 부활을 기대하거나 소망한 적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획과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자신이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 주셨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첫째, 고통의 자리에서 천국의 자리로 변화시켜 주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베다니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언덕이었다. '베다니'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집'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승천하게 하심은 슬픈 자, 고통 받는 자, 힘 없는 자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소망을 바라보게 하고자 하심이다. 이 소망으로 우리는 절망에서 위로를 받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두려움이 평화로 변화됨을 경험한다.
 
둘째,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의 삶의 자리를 예배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머물러 있을 곳은 거룩한 예배의 자리이다. 하나님 임재의 장소이다. 이것은 주님이 알려주신 복의 길이다.
 
셋째,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도 능히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가장 낮아지신 예수님을 가장 높은 자리인 하늘 보좌로 하나님이 높여주신 사건이기에 십자가의 길 그 끝에 하늘 영광이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것으로 큰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품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옥 목사
천안남부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