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21~26일

[가정예배]3월 21~2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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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17일(목) 14:21

월-성령이여 새롭게 하소서
본문 : 디 3:5~7
찬송 : 183장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를 원창조라고 부른다. 성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위한 원재료를 창조하셨고,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나, 여전히 혼돈(chaos)과 공허(emptiness), 흑암(darkness)이 덮여 있었다. 이러한 원창조 위를 성령께서 운행하셨다. 운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라헤페'인데 '어미새가 새끼를 낳기 위해 알을 품는 것'을 의미한다. 알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생명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알을 어미새가 생명의 온기로 품음으로 생명체로 탄생되듯,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찬 알과 같은 원창조를 성령께서 품으심으로 혼돈이 변하여 질서로, 공허가 변하여 속이 꽉찬 상태로, 어둠이 변하여 빛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창조된 천지를 품으시어 재창조하심으로 천지만물을 새롭게 하셨다.
 
성령님은 천지만이 아니라 죄지은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한번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인간은 육체는 온전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해도, 영혼은 원죄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이 새롭게 되기 위해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거듭나야 한다.
 
어거스틴은 방탕의 삶에서 돌이켜 주님께 돌아왔으나, 그후 매일 죄와 쾌락과 방탕의 유혹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때부터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하였을 때,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야 우리의 영혼이 정결케 되고, 우리의 마음 눈이 새롭게 열리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고,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깨닫고,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비워야 한다. 비움없는 채움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려면 먼저 배설물과 같은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죄를 회개하고, 욕심, 교만, 허영심을 비워내야 한다. 둘째,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비우기 위한 비움이 아니라, 채우기 위한 비움이다. 비움이 목적이 아니라, 채움이 목적이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성령으로, 말씀과 기도로, 믿음과 겸손과 은혜로, 신령하고 거룩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셋째, 흘려 보내야 한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썩는다. 받은 은혜와 축복을 계속 흘려 보내고, 나눠주어야 맑은 영성,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성령이여!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어, 주님의 뜻을 깨닫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성호 목사
서울베다니교회

화-나귀 타신 예수님
본문 : 마 21:1~11
찬송 : 141장

가진 것이 많을수록 교만해지기 쉽다. 때론 별 것 없는 인생도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며 교만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싫어하고 멀리한다. 반면 겸손한 사람은 누구나 좋아한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겸손하기까지 하면 사람들은 그를 더 높이 평가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겸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였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요, 말씀이셨다. 예수님은 입으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 삶 전체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의 나심부터 행동 하나하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건 전부가 말씀이요, 하나님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부터 고난 받으시기까지 한 주간은 예수님의 행적 전체가 상징적이고 계시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님은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풀어오라'는 간단한 명령을 하셨다. 주인이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왕권을 나타낸다. 왕은 모든 것을 소유하며 모든 것을 명할 수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 자신이 정말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의 뜻대로,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가? 무엇이 내 것인가? 실상은 주님께서 필요할 때 내어드릴 수 있도록 맡겨놓으셨을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게 된다.
 
둘째,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다. 왕은 얼마든지 크고 화려한 것을 탈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예부터 진정한 왕의 기본 덕목 중 겸손이 있었다. 왕이 겸손하지 못할 때 많은 문제가 생겨난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겸손해야 하고 백성은 그 겸손을 보고 충성을 다하게 된다. 교만한 권력에 굽히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굴종이다. 하지만 겸손한 자 앞에서는 자발적인 충성을 바치게 된다. 작은 나귀새끼 위에 올라타서 입성하신 예수님께 온 백성은 호산나를 부른다. 그 겸손한 분이 온 세상 만물의 왕이심을 알아차릴 때 그의 겸손하심에 깊은 은혜를 깨닫게 된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 그 분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오신 겸손의 왕이셨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습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광서 목사
영화교회

수-돌아서라
본문 : 딤후 3:5
찬송 : 505장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지적은 우리의 마음에 큰 찔림이 아닐 수 없다. '내용과 외모가 일치하는 영적체험'을 우리 모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부활의 감격을 누릴 수 있다. 경건생활이란 자신을 살펴 영적인 통찰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가는 것이다.
 
먼저 돌아서야 한다. 우리가 하룻동안 사용하는 단어는 2만 5000에서 3만 개 정도이다. 이를 통해 우리 마음의 사정을 많은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그 중에 얼마나 많이 주님을 고백하였는지 돌이켜 보자. 믿음 안에서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말보다 세상적인 계산과 내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면서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더 많이 하였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십자가만이 능력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행자죄하며, 교만하며, 불순종하였던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거듭 십자가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를 회복하라고 말이다.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명령하신다.
 
죄의 고백을 통해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며 아까워한다. 한 영혼 구원 보다는 남을 지적하고 상처를 준다. 때때로 우리의 양심과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 우리 자신을 고발할 때마다 핑계만 댄다. 용서와 화해의 언어로 말씀하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내 죄악을 고백해야 한다. "내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진실로 진실로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의 능력을 통해 돌아서야 한다.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사탄은 두려워 떤다. 기도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리에 있게 한다. 기도의 능력을 통해 제 몫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경건이다. 때로는 세리처럼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에도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다.
 기도하는 삶을 통해 인생의 새벽에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라는 확신이 넘쳐나는 계절을 누리자.
 
오늘의 기도
 
죄의 고백을 통해 기도의 능력을 통해 돌아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석윤 목사
광주상록교회

목-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본문 : 눅 5:17~26
찬송 : 458장

본래 바리새인은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계층으로 사회 불의와 도덕적 타락에 반발하고 율법 준수를 통해 경건한 삶을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유독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엄중히 대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래리 오스본 목사는 현대의 바리새인 신앙을 경고하는'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라는 책에서 바리새인의 특징을 교만과 배타성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사랑이 결핍된 획일적이고 무력한 종교를 만든 장본인이 되어버렸기에 예수님의 경책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어 한 가정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이 모였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막힌 길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갈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과 함께 예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남의 천장을 파손하는 행위는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으로 인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을 선택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문제는 간절함 없이 모든 일을 대충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 드리고 마음에 내키면 봉사도 한다. 간절함 없이 그저 시늉만 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에게서 간절한 믿음을 보셨고 중풍병자를 향하여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축복의 말씀을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가련한 중풍병자의 질병이 치유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하시고자 했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현장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내를 파악하셨다.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 내면에 가득한 영적교만과 자기고집, 예수님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배척했던 것이다. 관행과 자아신념이라는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성경을 교리와 종교 규례를 정립하는 보조 자료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만과 아집과 습관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고통 받는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이 행하실 위대한 일을 생각하라.
 
오늘의 기도
 
오늘도 눌림과 절망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회복을 주시고 주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일을 기대하며 거룩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광호 목사
더드림교회

금-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
본문 : 겔 37:15~23
찬송 : 221장

하나님은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서로 연합하여 주안에서 형통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대한민국도 하루속히 남북이 하나되고 복음으로 평화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하심 속에서 하나되길 원한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섭리가 묘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유다왕 르호보암과 북이스라엘 여로보암때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버리고 송아지 우상숭배와 아집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진다. 결국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폐역한 삶 가운데 주전 722년에 앗수르왕 살만 에셀왕에 의해 망해버린다. 그리고 남유다 나라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어린 예언에 귀기울이지 않은 결과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의 침입으로 마침내 주전 587년에 시드기야왕 때 멸망한다. 백성들은 낙심에 빠진다. 그때 하나님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 에스겔 선지자를 불러 포로민들이 처절하게 살아가는곳 그발강 가에서 하나님 주신 환상과 장차 이루시길 원했던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면서 나라 잃은 슬픔에 잠긴 백성 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상은 곧 마른 해골처럼 말라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며 마른 뼈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력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살이붙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 큰 힘을 가진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이상을 보여 주며 이스라엘이 일어날 것을 말씀으로 위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에게 이상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깊은 뜻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두 막대기를 준비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에는 유다와 그짝 이스라엘이라 쓰고 또 한 막대기에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이라 기록하라고 명령하시고 두 막대기를 하나로 합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곧 남북 이스라엘이 한나라 한 형제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씀을 전하게 한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환상이 포로된지 70년후 바사왕 고레스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형제자매가 하나 되고 성곽이 수리되고 스룹 바벨성전이 이루어지고 수문장 광장 앞에서의 말씀 부흥회를 통해 눈물로 회개하며 아멘으로 화답하며 온 백성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때 하나님은 결코 형제가 미움과 전쟁으로 나누어짐을 원치 않고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는 깊으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주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곧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통일을 향한 열정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본문 : 눅 11:30~38
찬송 : 151장

고난주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순종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평상시에 내가 신앙적으로 거북하고, 거절하고 싶은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기간이다.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므로 주님의 십자가 뒤를 따라가겠다는 결단이 일어나야 하는 기간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드렸던 기도를 떠올려보자. "(제자들에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세 번에 걸친 영적인 씨름 끝에 이렇게 기도하신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다. 그렇다.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힘들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내 욕심과 의지와 생각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가 그랬다. 천사가 나타났다. 본문 31절에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기의 형편과 상황을 고집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본문 38절에 대답한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말씀은 이런 뜻이다.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이라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를 억제하며 순종하면서 받아들이는 믿음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면서 가야 할까?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주님께서 가실 때였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한 자리 꿰차려 했던 12제자들은 도망갔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여인들이었다. 가시관을 쓰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가시는 주님을 따르면서 여인들은 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도 힘드실 것인데 그 여인들이 마음쓰이셨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너무 잘 설명해주셨다. 그렇다. 주님이 가신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길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에게도 이 눈물이 있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오늘도 참회하며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승호 목사
고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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