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2월 21~26일

[가정예배]12월 21~2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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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6일(수) 16:48

월-성탄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문 : 마 1:22~23
찬송 : 106장

세상의 모든 일이 어떤 것 하나도 기적 아닌 것이 없다. 우주가 질서 있게 운행하는 것,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봄이 되면 새롭게 새싹이 돋는 것 등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아닌 것이 없다.
 
더더욱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천년 전 인간의 몸에 착상되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자라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시는 총체적인 그리스도의 사건 그 속에 오늘 성탄의 의미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지난 10월에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여전히 평화가 없었다. 로마제국의 무지막지한 철권통치가 있었고, 종교권력자들은 민초들을 억압하는 어려운 시대였다. 예수님은 그 어두움의 세상을 뚫고 이 세상의 빛으로 영원한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출현하셨다.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떤 복음적 의미를 갖고 있는가?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나오는 '계보'는 구약 전체를 아우르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셨음을 말씀하면서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을 증명하셨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는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예언의 말씀을 역사적 사실로 성취하신 것인데 죄에서 구원하기고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해 가시겠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마지막장에서도 "내가 너와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당신은 우주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교회 머리가 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다가오는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에 착상되어서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탄생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기적중의 기적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도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영생을 주셨으므로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 약속은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지만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려고 죽어주시는 사역을 위해 오신 성탄절을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손덕호 목사
복음교회

화-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
본문 : 왕상 2:1~4
찬송 : 429장

얼마전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젊은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어 국가경영에 참여하게 된 고(故) 김영삼 대통령은 그 숱한 역사의 부침과 투쟁 가운데 닭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투지를 불살으며 생명까지 던져 정치적 야망을 펼쳤던 분이다.



그런 분이 마지막 가는 길에서 통합과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싸워봤다. 다 허무하다. 서로 하나되고 한 마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민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2, 3년전 전 가족 모임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불렀던 찬송가 384장이 방송에 나왔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궁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어머니가 늘 부르던 찬송이라 당신의 귀에 박혔다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부르던 순수한 신앙인의 모습은 감동을 주었다. 2년간이나 지리한 가택연금에 있을 때 그 고독하고 외로운 삶속에 그의 유일한 위로와 힘은 성경과 붓글씨였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는 재벌도 권력자도 지식인도 다 마찬가지다. 그의 권력과 지식과 소유를 다 내려놓고 믿음으로만 천국에 가는 것이다. 죽음은 항상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것이고 모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본문에 다윗의 임종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대장부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신앙의 대장부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걸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대장부의 신앙을 간단히 요약해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라.
둘째,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삶을 살아라.
셋째, 진실하게 살아라.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말씀 위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진실되게 거짓을 버리는 삶을 통해서 신앙인의 대장부가 되자.
 
오늘의 기도
 
말씀 위에 서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명을 진실되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기홍 목사
가재울중앙교회

수-예수님의 마음으로
본문 : 빌 2:5~11
찬송 : 455장 
올 봄 우울증을 앓던 부기장이 자살비행으로 독일여객기를 알프스상공에서 추락시켜 탑승객 전원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건들이 마음이 병든 사람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을 보면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한다.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탁월한 능력과 노력으로 학문의 성, 재벌의 성, 권력의 성, 인기의 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5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선언함으로 우리의 마음관리를 예수님이 가지셨던 태도와 자세, 사고방식으로 지키라고 한다. 이어서 6-8절에서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지켜야할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지신 겸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지만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낮아지셨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교만한 마음에 유혹되어 모든 관계에서 높아진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는 경배를, 이웃에게는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생명사랑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탄의 저주와 죽음이 점령한 우리 삶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채우시고자 십자가의 죽음을 온몸으로 끌어 안으셨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값을 치르셨다. 자신의 생명보다 우리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돈, 명예, 권세, 인기, 쾌락을 우리와 이웃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라고 유혹하는 사탄으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에 대하여 9~10절을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잊지 않고 품어 지켜내야 할 마음은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이럴 때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불행은 사라지고 안전과 평화와 행복이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 삶을 찾아올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생명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입혀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일숙 목사
인천세광교회

목-좋은 나무가 되자
본문 : 마 7:17~20
찬송 : 191장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콩 심은 곳에서 팥이 날 리 없고 팥 심은 곳에서 콩이 날 리가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열매를 보면 그것이 무슨 나무인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다. 못된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도 절대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좋은 나무는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삶에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게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하지만 못된 나무, 즉 성령충만하지 않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아닌 미움이, 기쁨이 아닌 짜증과 우울이, 화평이 아닌 분쟁과 다툼과 시기 등등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나의 삶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나무가 아니라는, 즉 성령충만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령충만하려고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성령충만하려고 하지는 않고 나의 노력으로 사랑하려고 애쓰는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나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맺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성령충만하려고, 예수님께 붙어 있고,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고 경건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무 힘과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께 꼭 붙어 있으면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오늘의 기도
 
하나님, 좋은 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연영돈 목사
거성교회

금-동역자
본문 : 롬 16:3
찬송 : 312장

초등학교 때 배웠던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이솝 우화가 우리나라와 이웃인 일본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거북이가 다가가 잠자는 토끼를 깨워서 손을 잡고 골인점을 같이 통과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르침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자만한 강자보다 성실한 약자가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은 개인의 승리에 초점을 맞춘 '개인 성공지상주의' 의식이 강하다. '이김'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김에 목적을 두면 누군가 한 사람은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 웃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우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일본의 가르침 속에는 '나' 보다 '우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이 교훈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자만심에 의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강자인 토끼를 깨워서 목적지까지 함께 가고자 하는 거북이의 삶의 지혜는 분명 '개인' 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상생의 원리를 본다. 같이 웃겠다는 것이다.
 
로마서 16장 전체를 보면 바울의 목회 사역에서 협력해 주었던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중에서 3절에 나오는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너무나 소중했던 분들로 소개한다.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도 아까워하지 아니할 정도였으니까. 이들과 바울의 첫 만남은 고린도에서였다.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에는 아덴에서의 선교사역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심적으로나 영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을 때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고백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믿음의 협력자를 붙여주신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웃음 속에서 만난 친구는 쉽게 잊어지지만 눈물 속에서 만난 친구는 영원히 잊혀지지 아니한다.' 그렇다. 바울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사람들은 힘이 되어 주었던 분들이었다. 이들 뿐이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 대부분에 발신인을 밝힐 때 자신의 이름과 동시에 함께 해 주었던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았다. 그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공동으로 제작하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위대한 작품이란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많은 수고로움의 손길에 의해서 탄생되어 진다. 우리는 다 함께 가는 동역자이다.

오늘의 기도
 
주변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협력하며 함께 걷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두기 목사
울산수정교회

토-빈 방 있습니까?
본문 : 눅 2:1~11
찬송 : 100장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 정부의 명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간다. 당시 여성들도 12세 이상이 되면 인구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직접 가서 호적을 등록해야만 했다.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
 
첫 번째, 여관 주인들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러 숙소에 가서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여관 주인들은 구세주를 임신하고 있는 마리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최소한 임산부를 배려하는 마음도 없다. 여관은 헬라어로 카탈뤼마이다. 여인숙, 가정집의 손님방을 의미한다. 자기 집의 손님방도 빌려줄 마음이 없다. 한 몫 잡을 기회라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니라 아기 예수가 거절되었다. 반면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다. 성령의 충만함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메시아를 알아볼 수가 없다.
 
두 번째, 목자들이다. 당시 목자는 미천한 직업이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목자들이 베들레헴 동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외로운 목자에게 천사가 다가간다. 예수님이 궁중에서 태어나셨다면 목자들이 아기 예수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했을까? 천사들이 나라 잃은 백성인 목자들에게, 미천한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은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진정한 평화는 로마제국이 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주신다고 선포한다. 목자와 같이 연약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평화는 세상권력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심을 믿고 전해야 한다.
 
세 번째, 현대인들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기 예수의 오심에 대해서 여관주인처럼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목자들처럼 반응할 것인가? 목자들처럼 반응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예수에 관한 출생이야기는 이미 종말론적 성취로 특징짓는다. 메시아적인 구주가 나셨다, 그의 영광이 이 땅에 비추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는 '에이레네', 구약에서는 '샬롬'이다. 이는 장차 도래할 메시아적 구원과 결부되어 있다.


대림절은 첫 번째 오신 성탄 그리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기간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기간이며 동시에 재림의 심판을 준비하는 참회의 기간이기도 하다. 찬미와 동시에 회개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작은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 때이다.
 
오늘의 기도
 
참회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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